[오피니언] "사바하"를 즐기는 3가지 관점 [영화]

글 입력 2019.03.24 00:5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기변환]사바하세로포스터.jpg
이때는 몰랐지.. 이렇게 재미있을지



오랜만에 스산한 영화가 보고 싶어서 3월 3일, <사바하>를 보러 갔다.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일부러 영화에 대한 소개조차 보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싯누런 색채의 오프닝은 오컬트 영화라고 말을 하는데 영화의 흐름은 스릴러였고 중간 중간 던지는 질문은 종교 영화였다.


나도 모르게 영화를 편하게 즐기는 것이 익숙해졌었나보다. 쉬운 오컬트라고 생각했다가 쉽게 해석되지 않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재도전해보기로 했다. 당일에 영화 리뷰와 댓글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며 이해의 틀을 잡았다. 그리고 정확히 2주 뒤인 3월 17일에 다시 보러 갔다.


뜬금없다고 생각되었던 장면은 의미가 살아있었고 갑작스러웠던 속도는 적절한 시간의 흐름이었다. 그렇게 120분을 밀도 있게 보낸 뒤 정리한 <사바하>의 포인트는 3가지이다.



01 장르영화 : 오컬트, 스릴러, 미스터리

02 선과 악에 대하여 : 기독교와 불교

03 구원에 대하여 : 신과 인간





01 <사바하>의 장르



먼저 장르영화로서 접근해보면 <사바하>는 초반 귀신이 나오는 부분까지는 오컬트였다. 결말도 무당과 악이 싸우거나 목사와 악이 싸우거나 스님과 악이 싸우거나, 혹은 셋 모두일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색채와 소름끼치는 음향은 이를 뒷받침했다. 그런데 박목사가 사슴동산이라는 불교계 단체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탐정스릴러로 흐름이 바뀌었다.


유쾌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Who has done it’, 누가 사슴동산을 만들었는가, 누가 사천왕을 만들었는가, 누가 살인을 저지르는가를 추격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스릴러 문법을 흐트러뜨리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신’에 대한 미스터리, 박목사가 품고 있는 원초적 질문과 사천왕이 따르는 신에 대한 의혹과 금화의 쌍둥이 언니인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크기변환]박목사.jpg
내레이터 겸 탐정 박목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인물은 분명 박목사인데 그는 스릴러의 현장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다.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김제석 일당이며 위험에 빠진 것은 금화와 그 언니이다. 박목사는 숨겨진 사건의 얼개를 풀어가지만 주인공이 아니다. 영화는 중반부터 미스터리에 빠진다. 관객은 악령을 잡다가, 범인을 쫓다가, 갑자기 ‘신’에 대한 질문에 맞닥뜨린다.


‘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대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김제석이 신이라면 왜 저런 행동을 하는가, ‘그것’은 왜 갑자기 부처의 모습을 하는가, ‘신’은 어디에 있는가.


박목사가 중간 중간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럽다. 박목사만의 미스터리가 마지막 사천왕인 정나한에서 관객에게로 퍼졌다. 그리고 반대 순서로 그것은 ‘깨달은 자’라는 부처의 형상으로 관객에게 답을 하고 정나한은 실행한다. 박목사는 끝까지 만나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독백은 여전히 사바세계에서 신과 구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크기변환][크기변환][꾸미기]그림3-tile.jpg
간단하게 정리한 3가지(혹은 5가지) 플룻과 장르의 변화




02 선과 악, 기독교와 불교



최후의 심판.jpg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
그날이 오면 악은 지옥으로 선은 천국으로



첫 번째로 이 영화를 볼 때 어려웠던 이유는 나도 모르게 뿌리 깊게 박혀있었던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먼저 구분 지은 뒤, 그것을 배경으로 캐릭터와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중간에 일어난 선악의 역전 혹은 붕괴는 나에게 혼란만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초반에 먼저 ‘그것’을 악이라고 단정 짓자, 돈에 덮인 무당의 행색도 악을 위해 어린 소녀들을 죽인다는 사이비의 교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 순간 ‘악’이 아닌 것이 ‘선’이 되었다. 나는 그토록 싫어했던 기독교의 경직된 교리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다.


영화는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끊임없이 말한다. 이분법적 구도에 메여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듯 ‘선악은 없다. 마귀조차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라고 얘기한다. 관객이 악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의 초자연적인 힘은 선도 악도 아닌, 그저 타고난 힘이었으며 살아있는 부처였던 김제석은 그림자에 잡아먹힌 인간이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정나한을 매개로 김제석을 처단하지만 이조차 ‘선’에 기반한 행위가 아니다. 그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가 기독교적 결말로 끝났다면 그것이 김제석과 직접 대치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일들이 밝혀지고 그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김제석을 죽이지 않았을까. 일반적인 클라이맥스처럼 극의 정점에서 모든 에너지가 폭발하고 끝났을 것 같다. <사바하>는 기독교적인 상징을 곳곳에 배치하긴 했지만 어쨌든 결말은 불교식으로 마쳤다. 김제석은 그것의 대리인인 정나한에게 죽고 그것은 김제석이 죽자 숨이 멎었다.


‘이것이 있기에 그것이 있고,

그것이 멸하기에 이것이 멸한다’




03 구원이란 무엇인가




대신 울어주는 자, 선의 극치, 죽지 않는 자

죄를 사하는 자, 천국을 약속하는 자

모든 것을 만들어낸 조물주


구원은 어디에



많은 사람들, 아마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구원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사바하>에서 사슴동산 사람들은 장군님들을 믿었고 사천왕은 김제석을 신으로 모셨으며 추후 정나한은 그것을 스승이자 신으로 따랐다. 잠깐 언급되었던 이슬람 소년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고 영화 초반 학교 강의에서 나왔던 수많은 사이비 종교들은 구원을 팔았다.


박목사는 머나먼 타국으로 종교봉사를 갈 정도로 신실한 종교인이었다. 그곳에서 신의 이름으로 가족을 잃은 그는 신의 존재와 자비에 의구심을 품는다. 사이비 종교들을 추적하며 그 실체를 까발리는 식으로 ‘신은 없다’라는 것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신을 찾고 있다.



[크기변환]사막 외로운.jpg
사막에서 정처없이 걷는 것처럼,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든 방랑



영화 속에서 그는 인간이 된 김제석을 만났고 신인 그것을 만나지 못했다. 이후에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는 여전히 질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이 어디에 있는지 묻기 전에, 신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정나한은 괴로울 때 옆에서 지켜주었던 자신의 신을 찾았고 김제석은 불사를 얻고 신이 되었다. 박목사는 기독교적 섭리에 의심을 품었고 그 순간 그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질문해야만 한다.


신은 무엇인가?


구원은 결국 각자의 구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박목사는, 우리들은 답을 해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은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생의 결정적인 순간 비극적인 실수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저 절망하는 것은 어리석다. 숨쉬기만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신도, 구원도 없을 것이다. 구원이라는 말이 종교적 색채가 강한 것 같다면 다른 말로 바꿔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예를 들어 행복, 사랑, 정의, 자유 등 자신이 믿는 우주의 중심을 찾고 그 아래에서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


나는 나를 인도해줄 신을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신은, 내가 찾는 답은 내 안에 있다. 그 답은 내가 하는 행동으로서 세상에 증명될 것이다. 나는 차라리 법칙으로서의 신, 스피노자적인 신을 믿고 나의 구원은 극락도, 천국도 아닌 이 세상에 있다.


*


영화 <사바하>는 오랜만에 신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준 좋은 영화였다. 우리는 인물들과 함께 잠깐이나마 신의 세상을 보았지만 현실에서 만나기는 요원한 것 같다. 그래도, 미스터리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신이 스쳐지나가지 않을까?





아트인사이트_리뷰단 명함.jpg
 


[배지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