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섭식장애 이야기] 그 원인을 찾아서 #5

글 입력 2019.03.2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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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카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그 날따라 차가운 얼그레이 한잔을 마시고 싶었다. 속이 비춰 보이는 유리잔에 들어있는 아이스 얼그레이는 음료와 함께 얼음을 씹어갈 때 내 속에 들어있는 무한한 갈증을 달래주곤 한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었다. 창밖을 보니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아 곧 비가 오겠다고 생각은 들었다. 준비해서 나왔더니 갑자기 비와 눈이 섞여서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노래방에 가고 싶어 현금인출기로 향했다. 돈을 뽑으면서 전날 편의점에서 샀던 물건이 결제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4,000원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 돈을 계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그까짓 돈을 위해서 가게의 정확한 매출에 오류를 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편의점으로 향했다.


나름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가게에서 돈을 정산해봐서 알고 있다. 100원이라도 차이가 난다면 어떤 마음인지를. 그래서 발걸음을 향했다. 그것은 '내가 되는 길'이었다.


편의점으로 향하던 길에 학교 호수에서 할아버지 단체를 만났다. 10명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언뜻, "저 학생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자"는 말이 들려와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어줬다. 눈이 많이 내려서 호수에 서 있는 학교의 상징물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들에게는 서로가 당장 필요로 하는 서로가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나에게 몇 학번인지 물어봐서 내 학번을 대답하니, 그들은 64학번 전자공학과 출신이라고 했다. 내 생각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이었던 것 같다. 70대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50년 만에 학교로 왔다는 그들의 말을 들었고, 장소를 옮겨가며 사진을 여러 장 찍어줬다. 머리에 눈이 쌓이고, 옷이 젖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사진을 잘 찍지 못하는 편이라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그 분들에게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


급한 일은 없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일도 없었고, 아무런 약속도 없는 날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하루를 내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왜 지난 시간 동안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편의점에서 결제를 제대로 했다. 어제의 잘못된 것이 올바르게 되는 과정이었다. 옛날처럼 노래방에 들렀다. 그다음에는 평소 블로그에서 봐서 가고 싶었던 카페를 향했다. 마치 그렇게 하기로 계획하고 나온 것처럼 말이다. 비도 오고 눈도 오는 궂은 날씨였지만 왠지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고 싶은 날이었다. 지금의 기분이라면 강남까지도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살짝 고 파왔지만 뭔가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난 1년간은 배가 고프기도 전에 뭘 먹을지를 생각하는 나였기 때문이다.


가려고 했던 카페 건너편에 스콘, 다쿠아즈, 쿠키를 파는 가게가 있길래 거기를 먼저 들렀다. 내가 좋아하는 스콘을 두 개를 샀다. 내가 찾던 스콘이 없어서 미안하다며 쿠키를 하나 서비스로 주셨다. 늘 생각하지만 나는 먹을 복이 참 많은 편이다. 어느 가게를 가더라도 서비스를 많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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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이름이 굉장히 독특한 곳이었다. 얼그레이를 마시고 싶어서 집에서 나왔지만, 이미 몇 시간 지난 후라서 그런가, 아니면 카페에서 나던 커피 향 때문이었을까. 아인 슈페너를 한 잔 시켰다. 아인 슈페너는 특이한 커피였다. 커피 위에 생크림이 올라가서, 뜨거움과 차가움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고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했다. 커피의 맛을 씁쓸하다고 해도 좋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유하자면 그랬다. 전혀 다른 성질의 두 가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을 생각해보면 별로 다를 것도 없다. 서로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만 만날 것처럼 하다가도,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것에 끌리게 된다.


카페 사장님은 아인 슈페너는 단숨에 마시는 게 좋다고 했다. '커피를 한 번에 마시라니, 6천 원이나 하는데'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알 것 같았다. 차가운 생크림이 부드럽게 입안에 들어왔고, 새카만 커피와 섞이니 아주 조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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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나에게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대답을 너무 쉽게 강요할 때가 있다. 난 정말 모르는데, 내가 모르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을 대할 때는 그토록 간단한 생각조차 힘들어질 때가 있다.


누군가 '정준영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남자인 자신이 보기에는 명백한 위법 행위이며, 선을 확실히 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어떠냐고 했다.


나는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도 대답할 수가 없다. 맨정신이었다면 조금은 대답하기 쉬웠을까. 그날따라 술을 마셨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걸까. 내가 이야기하기엔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고, 글이든 말이든 쓸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주더라도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그 질문이 난해해서도 아니고, 어려워서도 아니고 누군가 나를 비난할까 봐 걱정스러워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가끔은 그렇게 쓸데없는 일에 진지해질 때가 있다. 대충 어물쩍 '싫다'고 '혐오한다'고 넘어가도 될만한 일을 넘어갈 수 없을 그런 선이 있다. 그 선이 다가올 때쯤, 나는 정말 두려워지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도망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내가 있을 곳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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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소재를 찾아 길을 떠나고, 어떤 적당한 경험을 겪으면 다시 글로 풀어냈다. 그러면서 내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알아냈다. 어떤 사람들은 경험하면서 바로 느낄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바보'라기도 하더라.


그 카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곳이었다. 어떤 연예인이 무엇을 했다는 그런 가십거리를 쏟아내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진짜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돌 가수의 인기 있는 노래가 아니라, 음반에 트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나를 한때 정말 좋아해 주었던 아이가 재즈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그랬다. 고통의 무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마음속을 후벼 파고, 내가 이 글을 쓰게 되었던 한마디 말은, '고통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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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무슨 일이 가장 화가 나는 일이냐고 물어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라고 했다. 중학교 때 '잘나가던' 반장이 자기 교정기를 바닥에서 발견했다. 내가 주변에서 뛰어다녀서 교정기가 떨어졌다며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했다. 뛰어다니기는 했지만, 그런 처사가 너무 억울해서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 애의 책상을 때려 엎었고, 소화기를 던졌다. 난폭하고 감정적이었다고 해도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훈련받지 않고, 사회에 교육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보고 있는 넷플리스 드라마 '원헌드레드'에서는 지상 인과 하늘 인이 나온다. 그 드라마의 세계관은 지구에서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97년간 우주에 '방주'라고 불리는 곳에서 자손을 이어가다가 지구로 아이들 100명을 보낸 이야기다. 지상 인은 야만인이라고 불리고, 하늘 인은 우주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지상 인들은 '피는 피로 갚는다'며, 누군가 자신의 부족을 죽이면 무조건 살인자를 찾아서 처단한다. 하늘 인들은 자기들도 복수심에 불타오르면서 우리는 다르다고, 우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정의되는 것은 어떤 순간일까. 그 사람이 어떤 충동이 들었다면, '그런' 사람이 되는 걸까, 아니면 그 충동을 실현하는 순간이 '그런' 사람이 되는 걸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없다. 충동을 실현하는 사람과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좋은' 사람들은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추구되는 가치와,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우연히 같기에 존중을 받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존재고, 비슷하면서도 다 다른 존재들이다.


누군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낼 때면 정말 화가 나고 억울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애썼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누군가 나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살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내가 우연히 끼어들게 된 것뿐이지 나의 문제는 아니다. 그 사람이 직접 그것을 해결할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일 뿐, 괜히 나의 문제가 아닌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


그 사람의 블로그를 아주 오랜만에 들어가 봤다. 거의 2년 만이었던 것 같다. 잊고 지냈다.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블로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며칠 전에 갑자기 떠올랐다. 어떻게 그걸 잊고 지냈느냐는 듯이, 머릿속에 있었는데 내가 숨겨놓았다는 듯이. 정말 갑자기 한글자, 정확하게 모든 제목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너와의 연결고리를 잊고 싶어서 일 년 넘게 유지해 온 블로그를 단번에 삭제했는데 참 야속하게도 그 제목이 왜 떠올랐을까. 나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15킬로가 찌도록 나를 망쳐놓은 그 상처를 너는 3주 만에 극복했더라고.


자기가 저지른 짓을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으려는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질렀었다.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서 생색을 내려는 그 사람이 너무나 경멸스러웠다.


내가 유일하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주제. 내가 언젠가 이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아직도 생각만 해도 손이 떨리는 그 이야기를 극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아니야, 나는 어쩌면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쉽게 미워하고 증오할 대상을 찾은 거야. 그게 우연히 네가 된 거지. 나를 미워했던 수많은 사람에게 내가 개입하지 않았던 것처럼, 너도 그래서 나를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거지. 이건 내가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자기는 자기만의 삶을 찾으러 떠난 거야. 나도 나를 미워해 봤고, 너와 같은 세상의 수많은 남자를 미워해 봤는데 제일 쉬운 방법으로 너를 미워하는 방법을 고른 거야.


그래서 나는 나의 죄책감을 알기에 한마디 말조차, 단어 하나의 비난조차 꺼낼 수가 없는 걸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이 되었다면. 아직 내 속에서는 아주 생생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면, 복수심과 증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원동력이 되어서 내 삶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 바보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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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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