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 굴레방다리의 소극

벗어날 수 없는 비극, 굴레방다리의 지하
글 입력 2019.03.1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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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굴레방다리의 소극>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극을 보러 가는 날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최근 일주일 내내 봄 날씨를 유지하더니 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뻥하고 번개가 연속으로 치기 시작했다. 번개도 모자라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가 그게 진눈깨비가 되더니 다시 우박으로 변모해 후드드 떨어지기도 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선 이런 날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이 날씨가 왠지 연극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전조가 아닐까, 생각하며 종로5가 두산아트센터로 향했다.

 

관객석으로 들어서면 연극이 시작되기 전 준비된 무대를 엿볼 수 있었다. 크게 거실, 주방, 작은방으로 나누어진 목조주택의 풍경과 그를 단단히 잠그고 있는 철문이 삼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실에는 마오쩌둥 형상처럼 보이는 사진들이 걸려있고 두 명 남짓 앉을 수 있는 낡은 소파 하나와 맥주 캔이 가득한 테이블로 연출되어 있었다. 더불어 지하실 분위기를 내는 노란 백열등과 어두운 공연장의 궁합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어느덧 시야는 어두워지고 <굴레방다리의 소극>의 극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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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3.15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성질이 급해 극의 소감을 먼저 말하고 싶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연극이었다. ‘소극’보다는 스릴러 장르에 가까웠고 각자 주인공들이 가진 비극들이 중첩되어 휘몰아치는 절정에서는 호흡을 잠시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를 마무리하는 충격적인 결말에서는 그들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동시에 동행한 친구의 소감을 물었다. 연극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극을 관람한 친구는 다소 많은 인물 때문에 이야기 전체를 이해하진 못했다고 한다. 친구는 예고 없이 시작했던 그들의 소극이 연극의 시작인가? 하는 물음이 생겼지만 마트직원 김리의 등장과 그녀가 이들이 미쳤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도 그들의 연극이 거짓임을 알아차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공포감은 동시에 관객에게 전이됐고 극에서 김리의 역할은 외부의 고발자인 동시에 관객의 눈을 대변하지 않았나, 라는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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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



삐에로가 더 무서운 이유


 

삐에로 변장을 한 살인마나 범죄자들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들은 여타 악역들과는 궤가 다른 무서움을 자아내는데, 그 이유는 우스꽝스러운 가면과 그 내면의 존재가 극명한 간극을 가지기 때문이다. <굴레방다리의 소극> 또한 대식을 필두로 소극과 스릴러 사이의 극명한 온도 차를 드러내며 더 큰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들이 더욱 우스꽝스럽게 그들의 과거를 연극으로 꾸며내고 망가질수록 마냥 재밌게 웃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은 스릴러 장르와 맞물려 더 큰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중략)


술마시며 사랑찾는 시간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김완선 <삐에로는 우릴보고 웃지>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나니 김완선의 노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가 떠올랐다. 노래의 화자 삐에로는 남들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뒤로하고 가면 뒤에 숨어 살아간다. 화자는 세상들이 사랑을 찾으며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은 ‘진실’을 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다고 고백한다. 이런 역설은 김완선의 세련된 목소리와 어울려 광대의 고독감을 극대화한다.

 

극 중의 인물인 아버지 태식은 어떤가? 연변에서 저지른 충격적인 살인의 ‘진실’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각색하여 재연한다. 소극은 그에게 있어 삶을 버티게 하는 하나의 진통제이면서 동시에 그를 죄의식의 굴레에 옭매는 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극의 잔상은 켜켜이 그의 삶 속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곪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연으로 가장됐지만, 본래는 필연이었던 ‘사실’과 마주한다.

 

“다 너희를 위한 일이었어.

난 너희를 아껴주었다고”

 

둘째 아들 두철은 견디다 못해 아버지에게 연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그것을 지켜본 자신의 과거를 고발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진실을 외면한다. 다시 멱살을 잡고 폭력을 사용해 공포감을 조성하다가도 흐느끼며 연민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이상 행동으로 점철된 태식의 행동은 또다시 진실을 왜곡, 조작하려는 마지막 발악이었으나 이제는 그런 소극으로는 감출 수 없는 진실 앞에서 굴복하며 드디어 과거 연변의 진실을 고백한다.



 

끝까지 연극, 또 다시 굴레방다리


 

그들은 죽으면서도 연극을 지시하며, 연극을 행한다. 끝까지 진실이 외면되길 바라는 비극을 더욱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두철은 항상 벗어나고 싶던 굴레방다리의 철문을 열고 빛 한 줌 비치지 않는 지하방의 계단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10초가량 두철은 고민한다. ‘내가 이 세상을 벗어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저 세계가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나가기를 간절히 원하던 두철은 다시 철문을 굳게 닫는다. 그리고 시체가 널브러진 가운데 혼자만의 연기를 벌인다. 영화 <마더>의 마지막 장면처럼 두철은 온갖 독무를 펼치고는 또다시 고립된다. 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방 다리’에서 말이다.

 

‘굴레방 다리’는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는 편협한 사고방식이기도 하며 그들의 방구석이 되기도 하며 막연한 혐오감일수도 있다. 그리고 우린 선택해야한다. 두철과 같이 또다시 굴레방다리이거나, 저 멀리의 이상향이거나.



굴레방다리의소극_포스터.jpg
 



정일송.jpg
 


[정일송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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