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1월 31일, 세상에 없는 날이 온다면. [영화]

지구 종말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리고 순수하게 다룬 영화 'BOKEH'
글 입력 2019.02.2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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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기억력이 좋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숫자와 관련된 기억이라면 입술을 앙다물게 된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연인의 휴대폰 번호조차 한 번에 읊어내지 못하는 내게 그는 종종 시험해온다.

"내 생일 며칠이야?"
"11월 31일!"
"풋, 평생 살아봐 그날이 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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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지도 덥지도 않은 어중된 날씨의 6월. 서로를 완벽히 안다고 치부하지만 애매한 확신일 뿐인, 그와 만난 지 딱 6년이 된 날이다.

그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3단 서랍의 맨 아래 칸에서 무언가 꺼내온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세계 일주를 이뤄내겠다며 몇 해 전 사놓은 세계 지도를, 정성스레 말아 넣어두고선 처음 꺼내는 듯하다. 저벅저벅 걸어오며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테이블 위에 촤락 펼쳐낸다. 그리고 긴장된듯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호기로운 말을 뱉어내곤 마른침을 삼킨다.

"눈 감고 딱 짚어. 그리로 가자"

페로 제도 (Faroe Islands).

언젠가 결혼이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는 관례처럼 정해진 모든 것에서 벗어나 둘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습관처럼 이야기해왔다. 때문에 그가 지도를 꺼내올 때, 나는 그것이 여행을 가장한 청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말없이 손가락을 뻗는다. 페로 제도가 어디지, 내가 눈 감은 사이에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지도를 슬쩍 옮기기라도 했나? 평생 듣어본 적 없는 미지의 공간에 가게 될 수고로움을 생각하니 손가락을 조금 다른 각도로 뻗을 걸 하는 아쉬움이 일지만, 곧이어, 어디든 어때. 그와 매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면야 흔쾌히. 머릿속의 이 한 문장이, 잠시 들었던 불안을 잠식시킨다. 이날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그곳으로 떠난다. 아주 긴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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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들판을 양편에 둔 1번 도로를 한참 달린 후 산 비탈길을 올라 거대한 폭포를 만난다. 자그만 섬이 광활한 자연으로 채워져 있다. 그 속엔 적당한 수의 사람들로 인한 적당한 인적과 소음이 있지만 왜인지 고요하게 느껴진다. 그는 이 순간을 구식 필름 카메라 안에 더 완벽한 고요로 담아낸다. 납 덩이를 종일 매고 다니느라 피곤했는지 그는 침대로 달려들더니 곧바로 잠에 든다.

새벽인가, 눈이 뜨인다. 창밖을 보니 섬 전체가 밝아질 정도로 큰 섬광이 한차례 일다 사라진다. 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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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꿈을 꿔서인지 몸이 침대에서 벗어나길 거부한다. 반대로 그는 먼저 채비를 마치고선 따뜻한 진저에일이 담긴 머그컵을 들이밀며 날 일으킨다. 곧 우리는 호텔에 딸린 카페에서 아침을 해결하려 나선다. 하지만  지난밤 우릴 룸으로 안내한 백발의 주인장, 다른 투숙객도, 아무도 없다.

"지금이 몇 시지?"
"10시 30분. 여기는 하루를 조금 늦게 시작하나? 나가서 문 연 곳을 찾아보자"

거리는 한없이 고요하고 근처 펍에도 마트에도 사람은 없고 멈추어진 흔적만 있다. 각종 채널과 통신도 지난밤에 멈춰있고 곧이어 그조차 사라진다. 우리는 종일 인적을 찾다가 아무도 보지 못한 채 호텔로 돌아온다. 그는 창가에 서서 이런저런 추측과 방도를 쏟아낸다. 시곗바늘은 밤 10시를 가리키지만 밖은 여전히 밝다. 이는 멈추어진 듯한 느낌을 더욱 증식시킨다. 어둠이 내리고 오늘이 끝나면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지만 지지 않는 낮만 계속될 뿐이다.

"해가 지지 않을 거야, 나 좀 자고 싶어. 커튼 좀 쳐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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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의 종말인지, 온 세상에 일어난 일인지, 그렇다면 왜 우리만 남겨진 것인지. 원인 모를 나날들만 흘러간다. 이곳에선 우리를 살아가게 하기 위한 일을 제외한 어느 것에서든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차도, 신호도 없는 1번 도로를 한 시간쯤 달려 라일락이 가득 찬 들판에 멈춘다. 몸 위의 모든 허물을 벗고 들판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그가 잠시 뒤처진다. 이제는 자체로 완벽해져 버린 고요를 카메라에 담는다. 이렇게 우리는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즐기며 불안을 잠시 잊으려 한다. 하지만 곧 수도조차 끊기고 마트에도 상해버린 과일과 고기만 남는다. 그는 어디선가 구해온 연통으로 물길을 만든다. 나는 돌아갈 방법을 함께 찾을 누군가가 있길 바라며 모든 민가를 찾아 다시 길을 나선다. 달력 속 시간 개념을 따른다면 이렇게 한 달이 지났나, 두 달이 지났나. 집에 두고 온 일기장이 생각난다. 새 다이어리는 여기서도 구할 수 있지만 온전한 나의 것이 그립다. 원래의 내 것, 내 집, 내 존재가 살아있는 공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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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달력에 없는 날이 온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단지 숫자 안에 갇히지만은 않을 거나한 일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애석하게도 그런 날이 계속되는 이곳에서, 그는 미래를 지을 방법을 찾고 나는 과거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면 그저 살아갈 뿐이다.
달력 없는 나에겐 매일이 11월 3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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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을 가장한 영화 소개 글입니다. 영화 '세상 끝에서 우리는'(Bokeh)는 여행을 떠난 한 연인, 제나이와 라일리가 단 하룻밤에 사람이 멸종된 세상에 놓이며 그곳에서 단둘이 살아가는 과정 속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인한 현실적인 대립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에서는 인물에 대한 부연 설명 없이 여행지를 배경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저는 제 경험과 관점을 보태어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주인공 제나이의 전후 상황과 의식을 상상하며 그들이 갇힌 세상을 이해해보았습니다.




[김선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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