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실과 허황의 모호한 경계 - 뉴스, 리플리에게 [전시]

현대미술은 어떻게 현실을 비추나
글 입력 2019.02.2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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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리플리에게>

전시기간 : 2018.10.30 - 2019.02.24
장소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실2
관람료 : 무료
관람시간 : 평일 10:00 - 20:00
토·일·공휴일 10:00 ~ 19:00
뮤지엄 나이트(매월 1&3주 금요일)
문화가 있는 수요일(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10:00 ~ 22:00,
매주 월요일 휴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실2에서 진행 중인 <뉴스, 리플리에게>를 전시 끝물이 되어서야 보고 왔다. 이번 전시에 담긴 14개의 작품은 각기 다른 장르와 표현방법으로 작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담았지만, 한 공간에 모아둠으로써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을 형성한다.


그것은 바로 '뉴스', 그리고 '미디어'이다. 현대인에게 친숙한 SNS와 1인 미디어를 활용하여 누구나 정보를 배포하고 공유할 수 있는 오늘날, 온라인에서 공유되는 정보를 통해 소통한다. 그러나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정보가 분별없이 사실이 되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에 의문을 품은 작가들이 가상의 이미지를 현대미술로 풀어낸 전시가 바로 <뉴스, 리플리에게>이다.

리플리는 '리플리 증후군'과 연관되어 있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자신이 꿈꾸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으며 거짓말과 행동을 하는 반사회적인 인격장애를 칭한다. SNS가 퍼지고 인터넷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사이버 리플리 증후군이 흔해졌다. 별것 없는 자신의 행색을 온라인에서 꾸며내 모두가 부러워하는 거짓을 만들어내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말이 조금 거창하지만 아래 작업들을 본다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14개 작품을 모두 언급하고 싶지만 세 가지 키워드로 대표되는 작업과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작업을 소개하려 한다.



1. 뉴스 : 사실과 진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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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eovchae x 류성실, <체리밤>, 2018, 단채널 영상


위 작품은 천장에 매달린 세 개의 스크린에서 반복되는 영상, <체리밤>이다. 작가 류성실은 자신을 가상의 미국 유튜버 '체리 장'으로 설정한 뒤, 체리TV라는 1인 채널 방송을 한다. 이 방송은 북핵 미사일 추적을 소재로 하며, 미사일 공격이 일어나기 5분 전이라는 사이렌과 함께 국가 비상상황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 미사일 공격의 실체란, 초등학교 과학경진대회에서나 만들법한 엉성한 물로켓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북한 측 인사라며 '가만두지 않겠다.' 위협하는 영상 속 남성은 아무리 봐도 고위 간부보다는 백수 같기만 하고, 체리 장은 국가 비상상황을 선포하다가 갑자기 꿈 얘기를 하고 미세먼지 얘기를 하는 둥 참 두서없는 방송이다.

이 모든 건 사실 허황된 거짓이다. 진실과 사실의 판단기준이 불명확하고 거짓 정보들이 판을 치는 오늘날 미디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거짓 정보가 현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거대한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는 '뉴스'가 온라인상에선 손쉽게 만들어지고 배포되며 소비된다. 작가는 이런 사회의 모습을 뉴스 콘텐츠, 방송 형식을 차용하여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2. 소통 : 정치적 투쟁 사이 속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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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픽, <난민들>, 2015, 6분 38초, 360도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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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왼쪽에 상영되는 거대한 스크린 하나. 그 안에는 국내외 6개 영화제에서 수상한 <난민들>이라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그 옆에는 관객들을 위해 준비된 VR기기가 있다. 이 VR기기를 쓰면 난민들의 영상이 360도로 재생된다. 그리스의 한 섬에 상륙하는 난민들의 모습, 배가 정착하는 모습, 난민들이 육지에 발을 딛는 모습 등 그들의 행색과 상황을 통해 관람객은 난민이라는 문제를 직면한다.

동시에 헤드셋에서는 난민 이주를 반대하는 극우파들의 음성이 들린다. 이 공간에서 눈 앞에 펼쳐진 난민의 상황과 귓가에 울려 퍼지는 반대파의 목소리가 난민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묻는다.

기사와 뉴스의 목적은 객관적인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그 목적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각자의 입장 차이로 눈에 보이는 사실을 눈감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현대미술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현대미술이 현실에 개입하는 순간, 저널리즘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나아가 현대미술이 어떻게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가에 대한 하나의 방편으로 볼 수 있다.



3. 콘텐츠 : 한국 사회의 잘못된 욕망과 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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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이미지 헌팅>, 2018, 30분 10초, 단채널 영상


사실 이글은 이 작업을 소개하기 위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지 헌팅> 영상 속 이다은 작가는 한국 여성이자, 실제 '몰카'(몰래카메라)의 피해자이다. 지하철에서 '몰카'를 찍힌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인 몰카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경찰청과 민원실을 방문하지만, 법정은 가해자의 손을 들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몸을 찍었으나 이는 곧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 면죄부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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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 '길거리'와 'Street'을 치면 각각 나오는 이미지들은 한국 사회가 여성을 소비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온라인에서 소비되는 여성이란 존재를 파헤치기 위해 영상을 제작했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민원을 접수하고, 공중파 아침 방송에 나와 인터뷰를 하고,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몰카 범죄에 대해 토의를 하는 등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한 2년간의 노력은 끊임없었다.

다큐멘터리 형식과 팟캐스트 방송 형식인 작품은 중간중간 한국판 포르노라고 불리는 몰카 이미지들이 맥락 없이 등장하고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적인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 작업을 볼 때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들은 작가의 몰카 피해 경험을 마치 자기 일인 양 공감하고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건의 결론에 대해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여성의 신체 '몰카'이미지와 포르노에 등장하는 여성 이미지에는 다함께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작품과 더불어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다. 이 작품만 떼어 새로운 글을 쓸까, 고민하기도 했을 만큼. 현재 내게도 곳곳에 도사린 몰카의 불안감은 공중화장실에 난 구멍을 보고 멈칫하게 만들고, 화장실 거울엔 손가락을 가져다 대 이중카메라가 존재하는지를 검사하게 했다. 여성을 몰래 찍기 위해 뚫어버린 구멍처럼 여성의 일상 속 안전은 구멍 났다. 왜 한국 여성들이 이런 위험에 빠지게 된 건지, 야동이라는 콘텐츠는 정말 유해하지 않은 것인지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미지 헌팅>이다.

*

어쩌면 누군가는 욕구 해소를 위해 꼭 존재해야만 한다고 외치는 '포르노그래피', 한국의 '야동'은 꼭 존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콘텐츠로 인해 정말 성적인 욕구가 해소되는 가. 그 원초적인 욕망에서부터 사고는 시작한다.
 
한국에서 포르노는 프라이버시라는 관념을 지닌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재생되는 성적 욕망의 대체재다. 그러나 포르노는 페미니즘에서 주요하게 의문을 제기한 콘텐츠였다. 포르노라는 매체의 특성은 지극히 여성혐오적이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남성의 시선에서 줄곧 여성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의해 여성의 '몸'이 섹슈얼이란 형태로 타자화되고 여성의 몸을 보고 흥분하게 되는 세뇌 학습으로 이어진다. 강압적이고 지배 행위로만 압축되는 '섹스'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라는 노예화이다. 게다가 포르노 속 성역할이 가부장제를 답습한다는 여지가 있고 미성숙한 청소년에겐 성에 대한 획일적인 관념을 심기도 한다.

한국의 포르노, 야동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판 야동이 손쉽게 제작, 유통되면서 '몰카'라는 범죄 행위로 이어졌고 현실의 여성 피해자들이 생겼으며 그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부족하다. 몰카로 변질된 한국 야동의 현주소는 한국여성의 몸을 은밀히 찍는 것으로 남성의 젠더권력과 사회적 강자로서의 위치를 동시에 대변한다. 한국 여성의 몸이 타자화되어 보여주는 쾌락은 사적인 영역에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일상으로 흘러들어와 한국 여성의 삶을 망쳐놓았다.

야동이 성생활의 일부이자 당당한 쾌락의 도구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즐길 권리', 성적 욕구를 해소할 '권리'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야동을 볼 '권리'는 여성의 '인권'보다 중요한가. 이런 의문에 누군가는 즐기는 것 또한 남성 인권 중 하나라는 수박 겉핥기식의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은 야동에 담긴 여성혐오적인 맥락을 읽지 못한 것 내지는, 알면서도 외면한 것이다.

이 논제 속 인권에는 여성의 '생존권'이 달렸다. 아주 정상적인 성행위 포르노라 하여도 그 기반과 역사에는 여성의 도태된 인권이 깔려있다. 특히 한국 야동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통해 섹슈얼리티의 대체재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남성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한다. 페미니즘의 맥락을 벗어나더라도, 포르노가 지향하는 쾌락은 음침하고 일방적이다. 건강하고 자유로운 성의 쾌락보다는 퇴폐적이고 도구화된 성적 향락인 것이다.

성적 욕망의 해소방법이 포르노, 야동이라는 말로 정당화되려면 그를 소비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성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은밀히 잠식된 한국 사회에선, 야동이 건전한 쾌락소비가 아닌 몰래 여성의 몸을 찍고 소비하는 몰카로 타락된 한국 사회에선, 그에 대한 마땅한 대응책이 없으며 실제 피해자들에게 평생 씻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겼다. 게다가 불특정 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언제든 자신이 몰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이미 찍혀서 어느 사이트에 암암리에 퍼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암담함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마주한 <이미지 헌팅>은 현재 정부의 인터넷 검열 금지 시위에도 대입된다. 이 시위는 정부가 유명 국외 성인사이트 등 불법으로 규정된 웹사이트 접속을 차단한 뒤로 벌어졌다. 이 시위에 참여한 남성들은 "야동을 허하라", "야동 사이트를 금지하는 것은 사생활을 억압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권리를 주장한다. 이 시위에서는 정부의 SNI차단을 사생활 검열이라고 외치지만, 그 아래에는 성적 욕망을 해소할 야동사이트가 막혔다는 분노가 작용한다. 실제 기사에선, 이 시위에 참여한 이 중 야동 때문에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소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저희는 즐기고 싶습니다. 저희가 즐기는 걸 방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외쳤다고.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 아닌가. 위에 언급한 야동을 소비하는 남성들의 주장은 '볼 권리'와 '즐길 권리'로 대표되고 여성의 '생존권' 앞에서 언제나 당당히 주름잡는다.

이 참담한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구와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바로 젠더권력이다. 표현의 자유와 시장의 논리에 의해 성을 착취하는 수많은 유해 콘텐츠들이 알아서 걸러질 것이라는 것은 엄연한 환상이라는 문화비평가 이택광 교수의 말을 빌린다. 더불어 이제야 정부가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시동을 거는데, 이에 '볼 권리'라며 들고 일어선 일부 남성들의 행태에 한심함과 참담함을 느낀다.

이다은 작가의 용기 어린 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을 소비하는 콘텐츠를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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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타, <메이크업 대쉬>, 2017, 단채널 영상


이와 비슷하게 한국 사회가 여성을 소비하는 모습을 담은 두 개의 영상이 있다. 작가 치명타의 두 가지 영상으로, 이제는 낯설지 않은 뷰티 유튜버 콘텐츠이다.

좌측 영상은 '남자친구가 해주는 메이크업'을 콘셉트로 작가가 남자친구로 설정한 남성이 작가의 얼굴에 메이크업을 해준다. 영상이 끝날 때까지 남성의 굵은 목소리와 팔뚝, 손만이 나오며 그들의 대화는 여성혐오 범죄와 데이트 폭력이다.

우측 영상은 2017년 당시 최저시급 6,470원으로 할 수 있는 메이크업이란 콘텐츠이다. 작가는 값싼 싸구려 화장품들을 얼굴에 퍼 바르며 화장을 하지만, 메이크업 이름은 <투쟁 메이크업>이란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함축한다.

탈코르셋 운동이 심화되며 화장품 업계의 매출이 눈에 띄게 줄고 화장품 시장이 불황기를 맞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뷰티 유튜버나 1인 방송 미디어에서 여성의 화장이란 스테디셀러이다. 특히 좌측 영상 속 남자친구가 해주는 메이크업은 뷰티 유튜버라면 필수 코스인 콘텐츠로, 갑자기 유튜버의 남자친구가 등장해 어설픈 솜씨로 파운데이션을 퍼바르며 "와 이거 너무 어려운데?"한다. 항상 기괴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 몰라 찜찜하게 창을 닫아버린 수많은 영상들이 떠올랐다. 작가는 바로 그 찜찜함을 꼬집고 있다.

화장이라는 도구 자체도 여성을 억압하고 제한하지만 그에 해당하지 않는 남성의 존재가 등장하면 더 심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마치 모든 뷰티 유튜버가 짠 듯이 끝까지 얼굴 한 번 나오지 않는 그들의 남자친구는 이미 화장이란 수단으로 타자화된 여성을 한 번 더 타자화시키는데 일조한다. 대상화에서 자유로운 남성이란 젠더권력이 코르셋 콘텐츠를 만나 더욱 괴랄한 여성혐오 콘텐츠를 양성하고 있다.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은 서울 중심가에선 많이 떨어진 중계동 공원 한가운데에 있다. 가족 단위 혹은 어린 유아의 손을 잡은 부모의 방문이 잦은 이곳은 꽤 오래도록 지역과 공동체에 기반한 전시를 기획해왔다. 소외된 마을 주민들이나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시선의 작업을 주로 선보여온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냉철하고 사회비판적인 부류의 현대미술 전시라니. 전시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이로 낯설음과 색다른 감정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현대미술이란 사회의 기괴함을 폭로하거나 일상의 것을 차용하여 대중에게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은 일상 속 문제를 짚어내는 데 자유롭고 또 강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흔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불편함'을 끊임없는 고찰을 통해 시각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관람객이 거듭 고민하게 만든다. 이런 비판적인 메시지야말로 현대미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가 줄곧 생각해온 메시지를 담은 전시였다. 그래서 늦게 관람한 것이 아쉬웠다. 언급하지 않은, 좋은 작업이 많아서 더욱 아쉽다. 이 전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온라인상의 소통과 콘텐츠를 다시금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문제의식 제안의 장'이다. <뉴스, 리플리에게>를 기점으로 앞으로 북서울미술관이 선보일 사회 비판적인 전시를 기대한다.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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