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마음대로 하라지. 그게 네 운명이라면.
30.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미 곰의 죽음 또한 자신을 숲으로 이끌기 위한 운명의 한 단계였으리라.
88. 자신의 운명을 마주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90. 그 내면에는 오직 자신의 운명을 따라 걸어온 작은 곰을 향한
책 <작은 곰>을 읽는 내내, 꽤 자주 등장하는 ‘운명’이란 두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어려웠다. 운명이 있다고 믿는 편인데도 그랬다.
[운명]
명사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네이버 국어사전
운명에는 ‘이미 정하여져 있’다는 뜻이 있어서, 운명을 믿는다고 말할 때 나름 조심스럽다. 운명을 어떻게 정의해야할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믿는 운명은 수동적인 의미보다 안정적인 의미에 가깝다. 나에게 운명의 ‘이미지’는 나의 선택을 부질없게 만들 불가항력이 아닌, 그 선택이 모여 어떠한 모양이 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실마리 같은 것이다. <작은 곰>에서 말하는 운명도 비슷한 이미지 같았다. 그러니까 운명이란, 주체의 선택을 아무 쓸모없게 만드는 폭력이 아니라, 주체의 주체성이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는 걸 가정했을 때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부의 어떤 힘이다.
30. 삶과 죽음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치밀하게 짜 놓은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무결한 자연의 이치이기에, 살아 있는 한 그저 이끌리는 곳을 향해 걷기만 하면 된다. 그 후의 일은, 죽음은 그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삶은 한 번 발사된 탄환과 같다. 발사되었으므로, 직진하는 것이다. 때론 쉬기도 하고 여유를 즐기기도 하지 않냐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완전한 멈춤은 아니다. 일단 계속된다는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탄환에 작용하는 저항력이 속도, 진로 방향, 최종 도달 지점을 결정하듯, 마찬가지로 삶의 고난과 어려움은 각각의 삶의 패턴이나 모양을 결정한다. 이 모양을 만드는 절대적인 힘을 ‘운명’이라 하는 걸까. 그러니까, 삶이라는 게임 법칙의 설계자를. 설계자라. 그렇다면 삶과 운명의 출발점은 같은 것인가. 또 그렇다면 운명이 삶인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살게 되는 것이 존재의 운명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이 같은 삶에 어떤 존재는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없다. 내던져진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걷는 것이다. 주어지는 숙명은 무언가를 깨닫고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게 된 이유에 관하여, 나를 살게 하는 무엇에 관하여. 사명이나 꿈, 선과 악, 혹은 바다에 관하여.
비극은 여기서 시작이다. 삶 외부에 있는 운명이란 힘은 주체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 알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운명이 줄 수 있는 답은 단 하나, "너는 절대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58. 작은 곰은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한 이 숲의 악을 모두 없애고 말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다졌다.
86. 사명 따위는 잊었다. 삶과 죽음, 선과 악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어딘가에 있을 바다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애초에 삶은 작은 곰의 의지로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가 삶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작은 곰이 어떤 이로운 결과를 예상하고 자신만의 의지로 선택한 것들이 부른 ‘진짜 결과’는, 얼마든지 작은 곰을 소외시킬 수 있었다.
작은 곰에게 선과 악은 단순한 문제였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삶에 속한 내부자에게 삶의 외부를 조망할 방법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읽어낼 수 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선과 악'을 심판하려 한 작은 곰은 너무 순수하거나, 오만했다고 볼 수 밖에. 삶은, 주체가 ‘그렇게 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윤리나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능숙하게 비웃는다. 그러니 어떤 일에든 주체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삶은 그런 주체에게 ‘사명 따위는 잊도록’ 만든다.
주체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는 그래서 축복인 것 같은 재앙이다. 자신의 의지라 마치 자신이 휘두루는대로이루어질 것처럼 은연중에 확신하게 되며, 그 확신은 자주 주체를 배신한다.
18. 작은 곰은 덜컥 겁이 났다. 머리 뒤로 입구에서 비춰 들어온 햇빛이 아직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직 늦지 않았어, 초원에서 나뒹굴며 허기나 채우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운명은 주체가 하는 선택에 ‘얼마만큼’ 관여하는가.
예를 들어, ‘어째서인지’ 내키지 않는 마음 때문에 초원을 벗어나 미지의 땅으로 걸음을 옮기는 작은 곰의 선택은 온전히 주체적인 선택인가, 혹은 운명이 관여한 결과인가. ‘진창에 빠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의지는 온전히 작은 곰의 소유인가, 아니면 운명이 그런 의지를 발휘하도록 작용했나. 운명은 존재를 어느 정도까지 용납(주체가 운명에 거스르려 할 때)하고, 또 운용하는 걸까.
93. 운명은 여기까지다. 작은 곰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으로 운명은 제 역할을 다했다. … 작은 곰이 선택할 차례다.
운명은 주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힘인지, 주체는 운명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작은 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건 운명이 이끄는 단계가 있었고, 주체가 선택하는 단계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운명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문장 정도로 결론지을 수 있겠다.
‘운명은 주체를 어디론가 인도한다. 운명이 주체의 선택에 얼마 만큼 관여하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주체는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진 않더라도, 그렇다고 선택의 결과를 완전히 장악할 수도 없다.’
*
어쩌면 삶은, 운명은, 애초에 작은 곰에게 사명 따위를 부여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사명’이란 건 작은 곰 스스로 생각한 목적이었다. 그게 아니라 차라리 운명이 곰에게 바랐던 건 다른 게… 그러니까 단순히 바다를 바라보는 것. 그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이상한 결론도 없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사는 존재는 각자가 ‘사명이라고 믿는’ 한 가지씩 갖고 살아갈 것인데, 그게 얼마나 유효한 것일지. 거대한 사명을 갖고 삶에 배신(삶은 주체를 배신할 목적이 없었다.)당하며 살 것인지,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선과 악 따위는 뒤로 던져둔 채로 살 것인지, 그 둘의 사이를 적당히 배회하며 살 것인지. 이상한 고민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