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팔이] 7화: 유럽에서 바라본 서울

14박 15일의 유럽여행, 그 여정의 끝에서.
글 입력 2018.12.2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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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유럽에서 바라본 서울


2018년 12월 14일 오후 2시.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그 안에 담겨 있던 나. 장장 16시간의 비행 끝에 (망할 경유) 마침내 나는 그토록 고대하던 유럽의 땅을 밟았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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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뉘른베르크, 밤베르크, 로텐부르크, 드레스덴, 체코의 프라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할슈타트를 찍었다. 그리고 지금은 마지막 여행지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이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다. 정류장 위치를 구글맵에 잘못 찍어서 거금을 주고 예약해둔 버스를 놓치기도 했고, 숙소에 열쇠를 두고 나온 황당한 사건도 발생했다. (모두 내가 저지른 사고다. 미안하다 친구야.) 고등학생 때부터 가보고 싶다며 고대했던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는 아름다운 전경 대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칼바람과 비를 보여 주었다. 놀러 갔다가 유격하고 왔다. 피츠제럴드가 모든 인생은 붕괴의 연속이라고 했다더라. 오래도록 품어온 나의 기대는 그렇게 붕괴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길고도 짧았던, 이 아니라 그냥 짧았던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내가 머지않아 다시 서울 땅에 위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서울. 대한민국의 수도. 전체 국토의 0.6%를 차지하는 그 공간에 전체 인구의 20%가 몰려 산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살인적인 출근의 지옥도가 만들어지는 그 곳. 모든 편의시설과 교육기관이 이곳에만 몰려있는 탓에 기형적으로 집값이 오르는 그 곳. 마천루가 빼곡한 그 곳. 집들마저 자리가 없어 옆으로 퍼지지 못하고 위로 쌓이게 된 그 곳. 모두가 빠르고, 모두가 정신없는 그 곳. 서울. 나는 그 곳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살고 있다.



멍멍,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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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도시들은 서울과 다른 점이 많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개’였다. 맞다, 그 멍멍 개 말이다. 유럽의 도시에는 개들이 정말 많다. 물론 서울에도 개는 많다. 다만 서울의 개들이 집에서만 (많은 경우 아파트에서만) 돌아다닌다면 유럽의 개들은 주인이랑 같이 쇼핑도 하고 (크리스마스 마켓에 개들이 그렇게 많았다.) 심지어는 트램도 탄다. 이동용 가방에 들어 가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목줄과 입마개 정도만 있다면 개를 그대로 데리고 타는 것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준비물. 바로 ‘훈련’이었다.

유럽에서 내가 만난 개들은 대다수가 매우 잘 훈련된 얌전한 친구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똥꼬발랄 짖어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한인민박 주인아주머니가 주신 다소 믿음직스러운(?) 정보에 따르면 독일 사람들은 개를 키울 때 자격증 비슷한 것이 있어야 한다. 해서 그 사람이 개를 양육할 능력이 되는지, 매달 개에게 건강검진을 시키는지 등의 여부를 체크한다고 한다. 그냥 사람 키우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주인아주머니는 기나긴 수다, 아니 유익한 말씀의 종지부를 찍으셨다.

동물을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를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얼마 전 아트인사이트 글 중에서도 대형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햄스터에 관한 글을 봤었다. 생명을 사고판다니. 그가 책임을 질 수 있는지의 여부조차 따지지 않고. 그것도 훤한 조명 밑의 공공장소에서. 아직까지도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이다. 서울의 사람들은 소비행위를 통해 얻은, 따지자면 ‘물건’인 것에게 굳이 훈련을 시키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쉽게 얻고 쉽게 키운 것이니 버릴 때도 역시 아주 과감들 하시다. 해서 서울에는 ‘사회성이 떨어지는’ 개들이 넘쳐나고 유기견 보호소에는 철장마다 버려진 개들이 빽빽하다. 서울은 생명마저 소비활동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삼는, 지극히 ‘공장 같은’ 공간이라는 생각을 그 때 문득 했다.

(개 버리지 마시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 개 버리지 마시라.)



편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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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눈에 띄는 차이점은 ‘편리성’이다. 이 부분은 서울이 아주 압도적으로 승이다. 한 블록마다 편의점이 있는 서울과 달리 유럽의 도시들은 물이라도 하나 사려면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그 뿐일까. 서울에서는 핸드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떡볶이부터 족발까지 별에 별 것을 다 배달시킬 수 있지만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호사를 누리기가 힘들다. 가게들도 마감시간과 휴일은 칼같이 지키고 점원들 역시 본인이 퇴근을 했다면 손님이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다가오지 않는다. 해서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오래도록 머물었던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서울만큼 살기 좋은 도시는 없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서울은 정말 편리한 도시이다. 하지만 난 서울이 편리함을 제공하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24시간 편의점과 카페, 새벽까지 하는 영화관. 30분 만에 조리부터 배달까지 해주는 음식 서비스들까지. 서울의 모든 편의 시설들은 완벽하게 소비자의 행복과 편리성을 보장한다. 그렇다면 공급자는? 서울은 공급자의 행복과 편리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을까? 난 전적으로 아니라고 본다. 지금껏 내가 알바를 한 모든 곳에서는 친절과 미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내가 친절과 미소를 내보일 수 있을 만한 환경을 조성해주고자 노력한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식대 제공? 원하는 시간에 휴식? 청결한 휴게실? 모두 꿈같은 얘기였다. 나는 항상 내가 충분히 충족되지 못한 상태에서 고객님들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것은 서울의 땅에서 당연히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유형의 성실함과 긍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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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이역만리 유럽의 땅에서 나는 서울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이 제공하는 편리함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더러운’ 공급자의 위치에 있어본 사람만이 잘 알 터이다. 결국 서울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엔 사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상념을 나는 했다.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서울의 편리함보다 유럽의 불편함이 더 좋았다. 조금 걸으면 어떤가. 다른 상점을 찾아가면, 다른 웨이터를 기다리면 어떤가. 소비자인 내가 조금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공급자, 아니, 공급자이기 이전에 나와 동등한 한 명의 인간이 조금 더 편리성을 누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좀 좋아지지 않는가. 빠르고 편리한 것만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미소. 미소.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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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도시들과 서울의 다른 점 세 번째, 바로 미소이다. 서울의 사람들이 미소를 정말 짓지 않는 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곳에 와서 실감했다. 물론 내가 나라마다, 도시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만난 이곳의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거나 작은 친절을 받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미소를 보냈다. 미소를 받고, 답례로 나 역시 미소를 만들면 마음이 절로 따듯해졌다. 어렵지도 않은, 시간 드는 것도 아닌 이 기분 좋은 감성을 서울의 사람들은 왜 하지 않을까.

사실 유럽에 오기 전 동양인 혐오, 뭐 이런 것들로 불친절이나 혐오의 시선을 받을까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아, 물론 비하발언을 듣긴 했다. 두 번이었다. 동물원 원숭이 보는 표정으로 ‘니하오’와 ‘곤니찌와’를 시전하시더라. ‘안녕하세요’가 없어서 아쉬웠다. 분발하자, 한국. 그래도 이 경험은 ‘또라이는 어딜 가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또라이 보존의 법칙’에서 해석되어야 할 문제인 듯 하고. 내가 만난 대다수의 이곳 사람들은 나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미소를 보내 주었고 궁금증을 가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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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의 유럽 여행은 ‘따듯했’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너른 논밭과 다리 너머로 보여 오는 저녁 빛 밝힌 성곽들이, 밀려오는 백조들과 알록달록한 집들의 색깔이, 맛있던 음식들과 더 맛있던 맥주들이 지쳐있던 마음을 따듯하고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와 가히 같은 정도의 비율로 순간순간 마주친 사람들의 미소가 따듯했다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데 공헌하고 있다. 아름다운 전경을 보고 기쁨의 꿈틀댐을 선보이던 우리를 보고 너털웃음을 지으시던 헝가리의 할아버지,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시다가 미소를 건네자 비가 와서 어뜩하냐며 안타까워 해주시던 오스트리아의 할머니,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와 잠시 수다를 떨어주었던 독일의 오빠(?), 입국 심사대에서 친밀하게 장난을 치셨던 프랑스의 아저씨 등등. 이 분들 외에도 너무나도 많은 일상적이면서 가벼운, 하지만 나에게 와 닿는 순간 가볍지 않은 감사함을 주었던 미소를 보내주신 수많은 분들. 감사합니다. 당신들 덕에 저의 여행을 따듯하게 기억하며 갑니다. 모두들 안녕.

유럽도, 안녕.

p.s. 모두들 많이 미소 지으시는 2019년 보내시길 바랍니다. 따듯한 신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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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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