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시한 삶은 없어요 [영화]

조금 우울한 연말을 보내고 있는 당신에게
글 입력 2018.12.2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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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삶은 없어요"

조금 우울한 연말을 보내고 있는

당신을 위한 세 편의 영화





연말이다. 한 번의 일요일만 더 지나면 우리는 2019년을 맞는다. 누군가의 새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모퉁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새해는 늘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조금 위협적인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질문부터 던진다. 본격적으로 자기소개도 하기 전인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 말이다.



당신의 지난 1년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악수를 건네려던 나는 손을 바지춤을 슬쩍 닦으며 어색하게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고민한다. 어땠더라.


나는 늘 이맘때쯤이면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좌절감에 빠지곤 한다. 그냥 그렇게 1년이 지나버린 것만 같다는 느낌. 한 건 많은데 이상하게도 허하다. 1월의 나와 12월의 나는 분명히 다른데, 이상하게도 똑같다는 기분이 든다. 치열하게 달렸는데. 열심히 살았는데. 왜 제자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참 이상하다. 불현듯 인생이 시시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TV 속의 화려한 삶, SNS에 전시된 행복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초라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만 이렇게 공허한 건지. 나만 이렇게 초조한 건지. 웅크리고 앉아 고민한다.


그리고 이런 기분이 들 때면 꺼내보는 영화들이 있다. 세 작품의 누적 관객 수를 다 합쳐 10만 명이 간신히 넘는 이 영화들은 영화 마니아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일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기름기를 쫙 뺀, 이 저자극의 싱겁고 담백한 영화들은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에 길들여진 우리의 뇌에 평화로운 충격을 줄 것이다. 그들의 삶이, 그들의 일상이, 그 시시하고 싱거운 것들이 우리를 덤덤하게 위로할 것이다. 혀끝으로 퍼지는 달콤 쌉싸름한 한 조각의 초콜릿처럼 이 영화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녹아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절대 그 감각을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부터 당신의 주위를 맴돌게 될 그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1. 소공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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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공녀>는 오늘 소개할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서사적으로 재밌고 눈길을 끌 작품일 것이다. 한 갑의 담배, 한 잔의 위스키,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주인공 미소. 그런 미소가 제일 잘하는 건 요리와 집안일이요, 그녀는 적성을 살려 가사도우미로 취직해 일당 45000원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마저도 밥값에 집세에 담뱃값, 그리고  위스키 한 잔까지 마시고 나면 남는 돈은 얼마 없다. 난방도 되지 않는 좁디좁은 자취방은 어찌나 추운지. 섹스를 하기 위해 옷을 한 겹씩 벗어던진 한솔과 미소는 결국 추위를 참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오들오들 떤다. 그리고 한솔은 말한다. 우리 봄에 하자....


그리고 그런 미소에게 닥친 청천벽력. 바로 담뱃값과 집값의 인상이다. 충격받은 미소에게 편의점 아주머니는 'ESSE'가 아닌 '디스 플러스'를 권하는데, 어째 그건 미소의 취향이 아니다. 가계부를 끄적이던 미소. 몇 분 뒤 그녀는 결심한다. 집을 포기하겠다고. 그렇게 시작된 미소의 하루살이 인생. 미소는 옛 밴드부 친구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며 하룻밤을 신세 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친구들의 모습은 마냥 예전과 같지 않다. 집은 있지만 어딘가 조금씩 불행해 보이는 친구들. 집은 없지만 생각과 취향은 제대로 있는 미소의 여행은 어떻게 끝이 날까.


이 전례 없이 독특한 여성 캐릭터 좀 보라. 전고운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미소는 이미 '완성된 캐릭터'다. 자본주의의 돈 우선 가치에선 밑에 있으나 예의 있고, 강하고, 멋진 여자. 특별히 영화 속에서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캐릭터다. 이렇게 완전하고 확고한, 돈 없고 배짱 좋은 차분한 여성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가? '미소'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주인공이 성장하는 영화에 나 스스로 질렸다. 성장에는 아픔이 필요하다고 하고. 정말 필요는 하다. 그런데 그건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다 성장하진 않는다.


나까지 아픔을 중요하다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 감독 전고운의 인터뷰



흔히들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미소는 이미 인생 목표를 달성한 사람처럼 보인다. 자신을 확실하게 행복하게 해줄 것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소는 자신의 취향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섬에 깊이 뿌리박고 선 사람이다. 그녀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의연한 얼굴에 곧은 눈빛. 조곤조곤하지만 확신에 찬 말투. 영화를 보며 우리는 점점 미소의 가치관에 설득 당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소에게 위스키가 있다면, 나에겐 뭐가 있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나의 우선순위는 뭐지? '행복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 <소공녀>다.




2.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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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 모금산 씨는 그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열심히 비극 위로 페인트칠을 한다. 좋아하는 색으로 싱겁고 시시하게. 발걸음은 춤을 추듯 스텝을 밟고 있다. 잘 추지도 않는 것 같다. 근데 그게 멀리서 보면 엄청 재밌다니까?


어느 날 느닷없이 암 선고를 받은 이발사 모금산. 그는 자신의 아들이자 영화감독인 스데반과 그의 여자친구 예원을 소집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내놓은 것은 직접 쓴 시나리오,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다. 까만 중절모를 쓴 작은 남자가 주인공인 흑백의 무성 코미디 영화.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이 시나리오는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던 자신의 아내, 그리고 영화배우를 꿈꾸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렇게 시작된 미스터 모의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변변한 영화 한 번 찍어본 적 없는 스데반, 그리고 애인과의 권태로운 관계에 염증이 난 예원이 미스터 모와 함께 만들어가는 <사제 폭탄의 남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모든 삶은 영화가 된다



모든 삶은 영화가 된다. 이 영화의 메인 카피다. 정말 모든 삶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을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영화를 찍고, 대화하고, 농담을 던지는 그들의 일상은 곧 영화가 된다. 별 볼 일 없고, 시시하고, 그러다 폭발하고, 또다시 잠잠해지는데, 그게 모두 영화가 된다. 영화처럼 보인다. 정답은 간단하다. 모든 이야기에는 클라이맥스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이야기의 구성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고 말한다. 발단도 전개도 위기도 모두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이다. 전개가 없는 위기는 맥락이 없으며, 위기가 없는 절정은 재미가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아무 사건이 없어도 그건 영화가 될 수 있다. 아프고 고통스럽다면 그것 역시 영화가 될 수 있다. 당장의 변화, 당장의 성과가 아닌 그곳까지 가는 길 역시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클라이맥스 보다 더 재미있는 발단-전개가 있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어떤 위기는 마냥 아프지 않다는 것. 경쾌할 수 있다. 위기가 곧 클라이맥스가 될 수 있다. 행복을 선택할 단호한 손끝만 있다면 말이다.




3. 패터슨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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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감독의 가장 최근작.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한 이 영화는 무려 '일상', '변주', '시(詩)'를 키워드로 하는 작품이다. 벌써부터 하품 나오는 이 영화는 정신 차리지 않으면 졸기 십상이다. 하지만 짐 자무쉬가 그려내는 이 남자의 일주일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당신은 마지막에 웃고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 이불을 끌어당기며 당신은 그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테다. 그의 이름은 패터슨이다.


일상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일상이 된다. 이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의 삶이 그러하다. 미국의 소도시 패터슨에 살고 있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 그는 매일 아침 6시 잠에서 깨 시리얼을 먹고 출근을 한다. 그가 운전하는 버스는 23번. 정해진 루트에 따라 운전을 하는 그는 점심시간이 되면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는다. 그리고 시를 쓴다. 시의 소재는 그의 주변에 있는 것들이다. 성냥갑, 운전 중 들은 대화, 아내 등.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처럼 보이지만, 패터슨은 기민하게 그 속의 변화들을 관찰하고 느낀다. 그리고 그 감상은 곧 시가 되어 노트 위에 적힌다. 우리는 패터슨이 발견해내는 변화들을 따라가며, 조금씩 변주되는 그의 일상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다시 월요일. 감독 짐 자무쉬는 <패터슨>의 독특한 전개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반복을 사랑한다. 더 정확히는 무엇인가 반복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주에 흥미가 있다. 앤디 워홀의 프린트나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다. <패터슨>을 구상하며 나는 이 영화의 구조를 일상의 메타포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그 전날의 변주이지 않나.


- 짐 자무쉬 감독의 인터뷰



짐 자무쉬는 '일상'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한 감독이다. 그의 손끝 아래에선 누구의 삶도 영화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침 식사 중의 대화, 강아지, 점심 도시락, 산책. 그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영화로 만드는 힘은 바로 '관찰'에 있다. 패터슨의 하루는 어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을 발견하는 건 삶의 주인인 그 자신이다. '다름'을 발견하는 순간 오늘은 특별해진다. 어제와 오늘은 다르고, 오늘은 내일과 또 다를 것이다. 지하철 속 어깨를 부대끼는 사람들, 친구가 보낸 메시지, 엄마의 옷차림, 오늘의 구름, 공기의 냄새.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건 다름 아닌 시상을 발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찰하려는 마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심을 주는 일. 관심을 준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이다. 애정이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기억하려고 하듯,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깊이 느끼는 것. 시인이 된다는 건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


화려하지 않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이 세 편의 영화는 덤덤한 얼굴로 당신 가슴 깊숙이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넣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당신은 지루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들기 전 문득 생각날 것이다. 그 영화, 그 장면, 그 대사. 별거 없었는데. 싱거웠는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문 미소의 입술이, 미스터 모 씨의 개구진 웃음이, 노트를 끄적이는 패터슨의 뒷모습이, 당신의 주변을 맴돌 것이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시한 삶은 없다고. 틀린 인생은 없다고.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그 목소리 말이다.


조금 우울한 연말을 보내고 있는 당신에게, 인생이 권태롭게 느껴지는 당신에게 바치는 영화. <소공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그리고 <패터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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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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