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 피눈물 나는 헛수고_연극 '기묘여행'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ㅡ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글 입력 2018.12.1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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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출판사 '반비'




이 피눈물 나는 헛수고 앞에서



작년 여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 두 명의 남자 고등학생,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채 열두 명의 학생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다. 그리고 두 가해자 중 하나인 딜런 클리볼드는, 이 책의 저자 수 클리볼드의 아들이다.


수 클리볼드는 이 책에서 자신의 아들이 살아온 17년의 인생, 그리고 사건 발생 후 17년간의 일들을 정리한다. 사건 발생 이유를 짐작하고, 아들의 문제를 추측하며, 그의 행적을 좇는다. 딜런이 겪었던 우울증과 정신 질환, 그리고 유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은 영원한 형벌처럼 그녀를 1999년 4월 20일에 묶어놓는다. 자신에겐 빛과 같았던 아들이 악마성을 드러낸 날,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날. 딜런의 부모는 유족들의 고통에 크게 공감하고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아들이 죽어서도 고통받을까 걱정하며 안쓰러워한다.



하지만 곧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바로 내 아들이 그 다른 엄마에게 가한 슬픔 때문이었다. 그 엄마를 가까이 느끼고 싶었고, 나는 그럴 수 있었지만, 그 엄마는 내 위로만은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이어진 듯한 느낌에 뒤이은 외로움, 슬픔, 죄책감 때문에 나는 무너질 것 같았다. (p.90)


딜런이 이미 죽었는데도 나는 딜런 걱정을 많이 했다. 딜런이 저지른 죄 때문에 딜런의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할까 두려웠다. 딜런이 살면서 고통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죽어서도 계속 고통받으리라는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p.414)



부모는 끝끝내 객관적인 입장에 설 수 없다. 딜런은 살인자인 동시에 그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딜런이 저지른 비극을 참담해하면서도, 그녀가 아들을 다시 만나 하고 싶은 말은 오직 '미안하다'라는 말뿐이다. 그녀는 딜런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말한다.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딜런은 수십 명의 삶을 공포로 앗아가버린 살인자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누구가의 아들이고 가족이다. 인간이다. 이 아이러니한 비극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숙제를 안긴다. 삶, 죽음, 악,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어제 본 연극 <기묘 여행>은 이와 비슷한 짐을 떠안고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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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아빠와 일어나지 못하는 나



살해당한 15살의 소녀 카오루 그리고 카오루를 살해한 아쯔시. 연극은 카오루와 아쯔시, 두 가족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익숙한 자명종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카오루와 익숙한 베개가 없인 잠들지 못하는 카오루의 아버지. 그는 떠나게 될 기묘한 여행을 위한 짐을 싼다. 그리고 그 짐 꾸러미 안에는 살인을 위한 연장으로 가득하다. 그는 내내 카오루를 듣고 상상한다. 아이의 목소리, 노래, 웃음, 타박. 그는 아쯔시를 죽일 생각으로 이 여행을 떠난다. 그의 아내는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만.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 아쯔시의 부모는 잔뜩 겁에 질려있다. 처음에 말은 어떻게 꺼내야 할지, 그들이 화를 내면 어떻게 잘못을 빌어야 할지.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아쯔시의 엄마는 좀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은 한가지 비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날뛰는 말위에 올라앉은 상상'을 하는 것이다. 빠르게 달리는 말을 다스리려면 말고삐를 세게 움켜쥐어야 한다. 세게, 더욱 세게. 그 상상을 하면 마음이 진정될 것이라며 남편은 아내를 달랜다.


이렇게 만난 두 가족은 1박 2일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엉뚱해 보이는 장면조차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정도로 연극은 내내 서늘하고 긴장되는 분위기를 유지한다. 두 부모, 그러니까 네 사람은 모두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왠지 식은땀으로 젖은 등과 차갑게 식은 손발이 떠오른다. 불안감에 입술을 달달 떨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선 말이다. 그들의 모습은 수 클리볼드가 깊이 공감했던 C.S 루이스가 아내가 죽은 뒤 쓴 <헤아려 본 슬픔>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이 공포와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 연극은 너무 슬픈 나머지 공포마저 느끼게 한다. 아쯔시의 환영을 본 카오루와 카오루 엄마의 얼굴, '죽일 수가 없다'고 되뇌는 카오루 아빠의 얼굴, 시종일관 말고삐를 움켜쥔 듯 어색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머무는 아쯔시 부모의 얼굴은 모두 겁에 질린 사람들처럼 보였다.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들.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떠난 이 여행이 주는 거북하고 불편한 느낌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도 좀처럼 풀어지지를 않는다. 이건 절대 편해질 수 없는, 가벼워질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듯이.
 


아래의 글은 연극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해는 가능한가



중개자 테라하라는 여행 전 양 부모에게 인형을 만들어오도록 제안한다. 이 인형이 두 가족의 '공통 화두'가 될 거라던 테라하라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사람 모양의 흰색 봉제 인형. 두 부모는 인형을 만들면서 같은 고민을 했고, 같은 솜을 썼으며, 비슷한 크기의 고생을 했다. 크기만 다를 뿐 두 인형은 똑같은 인형이다. 그리고 테라하라는 산장에 도착한 뒤 두 인형의 이름을 알려준다. 카오루의 아버지가 만든 카오루 인형, 그리고 아쯔시의 가족이 만든 아쯔시 인형. 테라하라는 아쯔시 가족에게는 카오루 인형을 안아줄 것을, 그리고 카오루 가족에게는 아쯔시 인형을 칼로 찔러줄 것을 부탁한다.


이 장면에서 아쯔시 가족은 물론이고 카오루의 가족, 그리고 관객들 모두 불편감을 느낀다. 겨우 인형일 뿐인데 우리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인형은 단순한 인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쯔시라는 이름이 붙여진 순간, 그리고 그 인형을 만든 아쯔시 부모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그 인형은 단순한 인형이 아니게 되고 아쯔시는 단순한 살인범이 아니게 된다. 그는 인간이었다. 가족을 가진 인간. 그가 겪을 고통에 눈물을 흘려줄 사람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인간.


카오루의 아빠는 아내에게 묻는다. 왜 아쯔시 인형을 찌르지 못했냐고. 그러자 그녀는 답한다. 낮에 교도소에서 아쯔시를 본 것만 같다고. 그리고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다고. 아쯔시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고 말이다.


아쯔시의 땀을 보고 차마 칼로 찔를 수 없었다 고백하는 그녀의 모습은 조지 오웰의 짧은 글을 떠올리게 했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에서 한 사형수를 보고 이런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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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과 카오루의 엄마는 아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이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물웅덩이를 본능적으로 피하는, 손톱이 자라나는, 땀을 흘리는, 인간이라는 사실. 제아무리 끔찍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맞닥트린 것이다. 그래서 카오루의 엄마는 차마 아쯔시에게 칼을 꽂을 수 없었다. 가족이 있는 아쯔시. 누군가의 아들인 아쯔시. 그리고 땀을 흘리는 아쯔시.
 

하지만 극의 무게가 아쯔시를 향한 연민으로 바뀔 때쯤, <기묘 여행>은 다시 한 번 판을 뒤엎는다. 카오루가 겪은 공포와 비극을 직접적이고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며, 절대 아쯔시를 쉽게 용서해줘서는 안 된다는 듯 관객들을 흔들어 깨운다.


두 부모의 화해는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아쯔시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악에 대한 성찰을 다루고 있는 책 <잔혹함에 대하여>에서 저자 애덤 모턴은 화해와 용서를 일컬어 이렇게 말한다.



화해는 용서가 아니다. 화해의 목표는 그보다 더 심층적이다. 누군가의 행동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겠다는 뜻이다. 이상적인 용서는 진정한 참회가 있고 나서야 이루어진다. (...) 


화해는 다르다. 화해는 행위가 아닌 사람과 하는 것이며, 그 행위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눈감아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람과 화해한다는 것은 그를 미래의 공동 기획에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며, 협력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적대감이나 모욕감을 밀쳐둔다는 것이다. 화해는 특히 처벌과 복수의 욕구를 포기하는 일이다.



다음날 아침 서로의 인형을 맞바꿔 안고 있는 아쯔시 엄마와 카오루 엄마. 둘은 서로의 삶을 이해한 걸까. 이해한다면 화해는 가능할까.


하지만 '죽일 수가 없다'며 되뇌는 카오루의 아빠. 그의 얼굴엔 용서의 빛이 아닌 무력감이 짙게 드리워있다. 도저히 죽일 수가 없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사무치는 회한이 서려있다. 카오루의 복수를 해내지 못한,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 때문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결코 쉽지가 않다. 제아무리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끝내 해낼 수가 없다.


아쯔시와의 면회 시간, 딸을 죽인 살인마를 앞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카오루의 아빠와 '카오루를 되돌려달라'라며 울부짖는 그의 아내가 있다. 그런 그녀를 말리며 '항소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달라'라며 매달리는 아쯔시의 엄마도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지켜보는 아쯔시가 그자리에 있다. 아쯔시는 말한다. 자신은 살 가치가 없다고.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속 요조를 보는 듯하다. 실격당한 인간. 그리고 그를 앞에 둔 세 사람의 처절한 몸부림은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실격당한 인간은 구제할 수 없는 걸까? 그에겐 죽음만이 최선일까? 카오루의 죽음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저 남겨진 이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들은 용서할 수 있을까. 화해할 수 있을까?


두 가족은 어쩌면 피눈물 나는 헛수고를 하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르겠다.



[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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