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맛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12.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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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지나칠 수 없는 단어들: 시금치, 말차, 두유 또는 ‘아마자케(甘酒) 스프’ 같이 좀처럼 어떤 맛인지 떠올려지지 않는 것. 아마자케는 우리나라 식혜 같은 술이다. 두유로 만든 아마자케 스프를 출근길에 편의점에서 발견해 사들고, 사무실에 도착해 뜨거운 물을 콸콸 부었다. 기다렸다 한 입을 떠 넣었다.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맛이었다. 캐릭터가 분명해야 한다. 두유나 시금치 같은 것들은 호불호가 갈리므로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적당한 맛을 내려는 결정을 피하려 한다. 대신 두유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지나칠 수 없도록 콩 비린내와 고소함을 제대로 내야 할 것이다. 성격과 취향을 뒤로하지 말자. 늘 적당히 하다 보면 덜렁 속 빈 강정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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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바짝 긴장하고, 회사가 끝나면 카페에서 조금 차분하게 공부도 하고 글도 썼다. 이 무렵 일본 취업 준비생을 위한 글을 부탁받아 매주 기고했다. 자기 조금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빅뱅 이론을 보고 이불에 들어가서 뎃카이 아이스 모나카(큰 빵 아이스크림) 따위를 먹으며 구깃구깃 긴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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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날들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새롭게 떠오르기 전까지 정말 그랬다. 공주와 나를 나란히 얘기하기 몹시 민망하지만, 나는 마치 뭍의 왕자와 사랑에 빠진 인어공주처럼 괴로워했다. 동화 속, 마녀는 다리를 만들어 달라 말하는 인어공주에게 자비롭지 않았다. 원하는 바가 강렬하다면, 내놓아야 할 것도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 했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가진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놓고도, 가족과 친구와의 즐거운 일상을 포기해야 했다. 할머니는 그녀를 안전선 안으로 들여오려 설득했다. "우리 여기서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살자꾸나." 바다 궁전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인어공주와 깊이 교감했다. 힘겹게 얻은 소중한 취업 비자와 직장, 친구들, 아늑한 집, 주말의 호떡 아르바이트, 아침저녁의 도쿄 하늘, 마흔 살까지 외국살이를 하겠다던 꿈, 나의 정착을 진심으로 뿌듯해하시던 부모님, 내게 절대 소소하지 않았던 행복들을 모두 잃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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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출근길은 어찌나 추운지 주머니 밖으로 손을 빼기가 무서웠다. 소설가 김중혁이 쓴 글이 떠올랐다. 겨울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은, 불 꺼진 빈집으로 퇴근했을 때 싸늘함과 같다고. 주춤주춤 들어가 불을 밝히고 스스로 온기를 뿜어내며 방을 데워야 한다고. 아침저녁으로 공감의 이마 박수를 탁! 쳤다.


이 무렵, 나는 6개월간의 마케터 체험에 얼떨결에 종지부를 찍었다. 후배가 페이스북에 공유한 잡지사 에디터 모집 공고에 지원하게 되면서다. 많은 짐이 바다를 건너야 할 큰 규모의 결정이었다. 이성적으로 계산도 해보고 여기저기 조언도 구했으나, 결국 다니던 일본 회사에 퇴직서를 내고 한국에 새 이력서를 냈다. 퇴사 날짜는 정해졌고 비행기 표까지 끊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직이 정해진 다음 퇴직서를 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기다림은 길어졌고 공포는 이내 무력감으로 변해 나를 휘감았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 나는 절박하게 앞에 놓인 길만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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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동안은 "한 번 사는 인생,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럴 바에'로 만들어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는데, 참 이게, 이런 방식이 되게 어릴 때나 가끔 후배들에게 "언니 멋있어요." 같은 얘기를 듣는 거지, 어쩌면 사실은 황량하고 별 볼 일 없는 일 같았다. 비정상적이고 나이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으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쓸쓸해졌다. 10대의 문턱도 넘지 못했던 90년대에 가수 원타임의 노래와 무대는 별에서 온 전사처럼 멋있었다. 다시 보면 지금 나보다도 어린 그들은 마냥 악동같이 귀엽고 촌스럽다. 시간에 따라 시각은 달라졌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선택들은 지나고 각도를 달리했을 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원타임의 멤버인 송백경을 좋아했다. 그가 아비꼬 카레 사장이라는 말을 어디서 듣고 2년 반 동안이나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원타임의 <향해가>는 송백경이 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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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내 꿈을 향해가 날 위해.

내겐 없지 괜한 것에 고심. 쓸 데 없는 조심. 새가슴만의 소심.

넘어져도 포기는 못해 내 오기는 터지고 덤벼.

도전을 해봐 길없는 곳이라면 찾아봐.

내 삶을 과감하게 바꿔가.

지나버린 걸 따지려마. 이젠 됐지, 나는 내 인생의 참된 주인공.

나가! 너무도 이룰게 많지.

몰라! 우린 더 높이 원하지.

고집대로 걸어왔어도 후회없어.

나 절대로 뒤를 보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할 생각 뿐야.

멋있다 생각도 하고 유치하고 귀엽게 느끼기도 했지만, 원타임의 오글거리는 가사와 열심인 목소리는 좋았다.

 

긴 기다림 끝에 불합격이 확정되고, 에디터가 될 다른 방법을 찾고 준비해야 했다.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각이 흩어지고 또 약해지고 있었다. 용기의 말들을 촘촘히 모았다. 이건 지금의 나뿐 아니라 후에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선 것을 후회할 내게도 도움이 될 것들이었다. 주저하는 내게 대뜸 축하를 내밀던 말 - “하고 싶은 걸 찾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네가 정말 큰 일을 해냈다고 생각해.”, 잡지 <대학내일>에 글을 투고하는 소설가를 소개해 준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 –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네가 낸 용기에 도움이 되고 싶네.”,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는 내가 버겁다던 친동생 – “함부로 결정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언니랑 잘 어울리네.”

하고 싶은 일을 말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있었고, 모아놓은 돈은커녕 이력서에 도움이 되지 않을 짧은 경력들이 실패한 과거를 말하는 듯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명확히 좋아하는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어떤 시인은 말했다. 시인이라서 30만 원을 버는 게 아니라, 시인이기 때문에 30만 원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아무도 더 하고 싶은 일을 물어오지 않았고, 나는 시인도 아니며, 요즘 세상에 정말 한 달에 30만 원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다섯 시 반에 알람도 없이 눈이 떠졌다. 요새 트렌드가 쉬어 가고, 속도를 늦추고, 비우는 것이라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내 행복의 척도다. 하고 싶은 게 잔뜩 떠오르면서 번쩍 뜬 눈은 알람으로 뜬 눈보다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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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쿨 오브 락>에는 주인공 듀이가 학생들에게 마구 역할 분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타를 쥐여주고, 노래를 시켜보고, 말투를 관찰하다가 정해준다. “썸머야, 너는 이 프로젝트의 프로듀서가 되는 거야. 밖에 서서 누가 오는지 보고 있으면 돼.” 말도 안 되는 역할을 떠맡게 되기도 하지만, 아무도 이 자리를 나보다 소화 잘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 의심하지 않는다. 제 자리에 만족하고 열심히 연습하고 공연은 성공적이다. 대단하고 커다란 누군가 나타나서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얘기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고민도 없이 그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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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예쁘게 구워진 호떡이 한 장 있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내가 이 호떡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구웠는지 떠올리기로 했다. 설탕 속은 전혀 쏠리지 않고, 한가운데 잘 퍼졌다. 겉이 두껍지도 않고, 속이 반죽을 비집고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작거나 크지도 않고,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눌렀으며, 뒤집는 타이밍도 늦거나 빠르지 않았다. 특기나 장점을 말할 때 한참을 망설이다가 "저는 못 하는 게 없는 걸 잘합니다." 같은 헛소리를 지껄였었는데, 앞으로 당당하게 "아, 저는 말이죠. 호떡을 꽤 잘 굽습니다."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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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은 중세 국어에서 ‘개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그 사람답다, 나답다’가 될 수도 있다. 선조들은 나다운 것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내가 멀게 생각하던 월급이나 위치보다 아름다운 건 자신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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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람 복이 있어서요."로 시작하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인생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가 가치 있다. 팀 분위기가 결과를 좌우하는 것처럼, 인생은 팀워크이라 생각한다. 사는 데 있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중요하다. 그냥 타고난 것처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복이라고 말해버리기 아까운 일이다. 좀 더 소중하게 대하고 진중하게 다루었으면 한다. 사람 복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로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을 얼버무려 묶어버릴 생각은 없다.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꿈을 (또) 만난 다음 단계는, 진심으로 용기를 건네준 친구들에게 뻣뻣하지 않은 이별을 고하는 일이었다.

 




[조서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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