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의 찬미>, 매혹적임과 비겁함 그 사이 [영화]

글 입력 2018.12.0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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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넷플릭스에서 어떤 것을 볼지 화면을 손가락으로 내리던 중 한 드라마가 눈에 들어왔다. 이종석과 신혜선 주연의 3부작 드라마 <사의 찬미>였다. 6년 전 드라마에서 같은 반 친구 역할이었던 둘이었는데 새로운 드라마에서 연인인 모습을 보니 괜히 오글거리는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치 친하게 지냈던 동창 중 두 명이 연애를 선언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풋풋하게 느껴지기도 한 그 오글거림과 기대감을 안으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사의 찬미 포스터.jpg
 


뜨겁기도 하다 이 가슴은,

갑갑하기도 하다 이 가슴은


 

<사의찬미>는 1920년대 유명 성악가였던 윤심덕과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던 김우진의 정사를 다룬 내용으로 뮤지컬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친숙한 소재의 이야기다. 윤심덕의 삶에 더 조명했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드라마 <사의 찬미>는 김우진에 더 중점을 두었다.


 

 

 


<사의 찬미>, 윤심덕과 김우진


 

김우진.jpg
출처 : 신동아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서대문정 윤수선.’


어느 새벽,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는 빈 승객 방에서 캐리어와 이 쪽지를 발견한다. 놀란 급사는 조타실로 향했고 즉시 승무원들은 사라진 두 승객을 찾기 위해 주변을 수색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승객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후에 이 두 승객, 김수산과 윤수선은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것이 밝혀졌다.

 

어떠한 유서나 증인 등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여러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도 두 사람이 실제로 연인이었는지에 대한 뚜렷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다만 이 미스테리한 사건과 이루지 못한 연인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추측은 지금까지도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어주고 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에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알까


<사의 찬미>는 윤심덕이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 일본의 한프로덕션에서 녹음한 곡이다. 사건 이후 이 앨범은 큰 주목을 받게 되었고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시초 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삶에 대한 허무함과 무력함을 표현한 이 곡은 두 남녀의 이야기에 비극성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매혹 속 비겁함


 

당시의 시대상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연인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프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마치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사의 찬미>는정말로 매혹적인 소재다. 이어질 듯 이어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와 1920년대의 경성 풍경에서 더욱 애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종석.jpg


조국의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의 김우진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어로만 이루어진 극을 올리고 자유에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김우진은 총독부에서 고문을 받기도 한다. 총독부가 일본어로 말하라고 할 때조차 자기 뜻을 꺾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화나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맞서는 모습에서 어떻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윤심덕과의 관계에서는 비겁하게 느껴졌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 스킨십을 하려고 할 때마다 김우진은 주저한다. 할 듯 말 듯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유뷰남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유부남인 것을 윤심덕에게 알리는 모습에서 특히 비겁해 보였다. 윤심덕과 동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후 자신의 아내를 소개한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는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드라마에서는 ‘어쩔 수 없는’이란 것처럼 말하는 듯하지만, 그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직접 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알리는 모습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모던 보이 = 가치관의 대립, 모던 걸 = 못된 걸


 

김우진과 같은 ‘모던 보이’의 사랑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있다. 당시 대부분의 모던 보이들은 조혼 관습으로 이미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아내와 달리 근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모던걸을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제나 이곳에서 의문점이 들었다. 같은 불륜이더라도 왜 모던 보이는 ‘봉건적인 가치관과 근대적인 가치관의 대립에 혼란스러워하는 청년’이라고 표현하면서 모던걸들은 왜 ‘못된걸’이 되는 걸까? 원래 그 시대가 그렇다고 말은 하지만 씁쓸함을 감출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모던 보이와 모던 걸에 대한 평가가 너무 다르다. 흔히 모던 보이들은 작품 속에서 ‘가치관의 대립’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온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의 남편처럼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는 조선현실에 대해 술을 마시며 개탄한다. 그렇다면 왜 나혜석과 같은 모던걸들은 거기에 속하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 역사 시간에 ‘모던걸’에 대해 배울 때 잠시 언급되고 나혜석을 비롯한 모던 걸들의 고민에 대해서는 공부한 적이 없었다. 옛날과 다른 시대라고 말하지만 왜 모던걸은 아직도 봉건성과 근대성의 차이의 예로 보지 않는 걸까?



모던걸.jpg
모던걸을 비판하던 1920년대 만평


불륜을 예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김우진과 같은 불륜을 한 모던 보이들은 가치관의 대립이라고 말하지만, 나혜석은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 둘이 맥락이 달라서 그 비난 또한 다르다고 말할 수 볼 수도 있다. 김우진은 봉건성이라 대표되는 전통적인 모습의 아내 ‘원하지 않는 결혼’을 ‘억지로’ 했다. 그리고 모던 걸들과 자유 연애를 했다. 반면에 나혜석은 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자유 연애를 했다. 나혜석에겐 전통적인 모습의 남편과 억지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맥락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둘다 불륜을 했다는 것에선 다르지 않다. 불륜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다른 것이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나혜석은 아이와 남편을 저버린 천하의 나쁜여자고 김우진과 같은 모던 보이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청년인가? 김우진도 처자식을 저버린것인데 왜 비난의 정도는 나혜석이 더 강한 걸까? 당시 비난의 정도가 아예 다른 것은 나혜석의 <이혼 고백서>에서도 알 수 있다. 자신은 불륜 사실로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받지만, 남편은 대놓고 기생을 집 안을 데려와 바람을 피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무도 남편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나혜석은이 모순에서 씁쓸함을 느낀다.

 

여전히 모던 보이의 불륜은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압박과 이상의 대립’이라고 <사의 찬미>에서 표현한다.그리고 김우진을 매력적으로 표현한다. 아직도 나혜석에 대해 다룬, 모던 걸의 불륜은 ‘사회의 압박과 이상의 대립’이라고 말하는 작품이 주목받은 적도 없고 나오지 않는다. 2018년의 지금이 과연 1920년대와 다른 것인지 의문이 들면서 씁쓸하기도 하다.



[연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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