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노잼과 로망 사이 피아노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피아노 리사이틀
글 입력 2018.11.2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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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화요일, 예술의전당에 다녀왔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았으면서 한 번도 예술의전당을 가보지 않았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내가 이렇게 예술과 먼 사람이었다니? 나름대로 문화를 잘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부터미널 역에 내려 예술의 전당까지 걸어가는 10분 동안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노잼과 로망의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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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혹은 그 이후 태어난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씩은 피아노 학원의 문턱을 넘어봤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가게 된 피아노 학원은 정말 노잼 그 자체였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뭔가 세심하게 하는 것에 재주가 없다는 것을, 피아노 학원과 미술 학원 때문에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정말 손재주가 없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저 검은 콩나물들을 보면서 건반을 두들겨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손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고, 그래서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교재의 포도알들에 색칠만 열심히 하던 시간이었다. 당연히 두 달도 되지 않아 학원을 그만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때, 갑자기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어졌다. 질풍노도의 고2병이 온 건 지, 다가오는 고3 스트레스를 외면하고 싶었던 건 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길로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생각해보면 그 때 한창 유튜브에서 가요, 팝송을 피아노로 커버한 piano ver. 영상을 찾아 보던 시절이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학원에 갔다.


하지만 국영수탐 성적이 제일 중요한 우리나라에서 아무래도 시험 기간엔 학원을 빠질 수밖에 없었고,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져갔다. 활활 타올랐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나의 냄비근성이 십분 발휘된 예였다. 이번에도 학원은 반 년을 넘기지 못했다.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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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지고 보면 나는 피아노와 그렇게 친한 사람이 아니다. 리사이틀 후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사인을 받기 위해 초롱초롱한 눈으로 긴 줄을 서 있었던 피아노 꿈나무들과는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다르다. 하지만 연주는 못해도 듣는 귀는 있어서, 길을 걷다가도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춰 서 연주를 감상하고는 했다. 연주하지도 못하면서 마음에 드는 곡의 악보가 있으면 프린트 해놓기도 했다. 어쨌든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연주는 깔끔했다. 프로그래밍된 알파고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계획된 대로 움직이는 연주 같았다. CD를 듣는 것처럼 거슬리거나 불안함이 없었다. 정말 정확한 타이밍에 격렬해지고 정확한 타이밍에 부드러워졌다. 유일하게 프리스타일이라고 느낀 것은 페달을 밟았다가 바닥에 끌다가 하던 그의 한 쪽 발의 각도였다. 그도 사람인지라 페달에서 발을 떼어 놓을 때 어떤 위치에 놓을지까지 정확히 맞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거슬림 하나 없는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연주는 눈을 감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쇼팽 곡으로만 구성된 그의 연주 중 가장 귀를 사로잡았던 곡은 ‘환상 즉흥곡’이었다. 익숙한 멜로디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시 유명세를 떨칠 만한 서사였기 때문이다.


강렬하게 시작해서 꿈꾸는 듯 부드러운 환상 속으로 빠졌다가 다시 낭만적인 절정에 이르는 움직임에 5분 동안 다른 세계에 있는 듯 했다.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나에게 노잼과 로망의 피아노 사이에서 로망의 피아노 쪽으로 기울게 해준 공연이었다.


다음날 한 켠에 치워 두었던 먼지 쌓인 피아노 악보를 꺼내 몇 번 연주해봤다. 손도 굳고 피아노도 굳어 제대로 된 연주가 될 리 없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피아노 건반 소리는 여전히 마음을 울렸다.




예술의 에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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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에 대한 로망을 찾은 것 외에 배운 것이 있다면 클래식 공연 에티켓의 중요성이다. 특히 클래식 공연에서는 에티켓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는데, 이번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연 중 계속 들리는 잔기침, 헛기침, 속삭이는 소리에 괜히 내가 불안해졌다. 작은 소음에도 공연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눈을 감고 감상하다가도 에취! 소리가 들리면 눈이 번쩍 뜨였다.


클래식 공연의 에티켓을 잘 모르겠다면 주위 사람들을 따라하는 눈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이 쥐죽은 듯 조용히 있고, 자세를 바꿀 때도 부스럭 소리가 날까 조심조심 바꾸는 이유는 그들이 소심해서가 아니다. 박수치는 타이밍 역시 눈치를 보다가 사람들이 치면 그 때 같이 치면 된다. 보통 연주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면 박수를 친다고 한다.


앞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을 때까지 피아노 소리는 좋아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내가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또 생겨날 거고. 가끔 노잼이어도, 가끔 로망일 테니.



[김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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