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 비서와 강 팀장, 드라마 속 비서의 모습 [문화전반]

글 입력 2018.09.22 01:3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5.jpg
 

화려한 출연진과 탄탄한 스토리로 눈길을 끌던 의학 드라마 < 라이프 >가 어느새 종영을 맞이했다. < 라이프 >는 전작 < 비밀의 숲 >으로 백상예술대상을 거머쥔 신예 작가 이수연의 작품으로, 이수연 작가는 < 라이프 >를 통해 전작의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충실한 고증과 빈틈없는 서사를 그려내며 밀도 높은 작품을 만들었다는 호평을 듣고 있다. 필자 역시 바쁜 와중에 틈틈이 < 라이프 >를 즐겨보는 애청자 중 한 명이었는데, 조승우, 문소리 등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열연과 흥미로운 스토리도 한몫 했지만 필자의 마음에 가장 들었던 점은 로맨스와 선악 구분이 뚜렷한 한국 드라마의 전형을 뛰어넘어 실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상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소소하게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구승효 사장(조승우 분)의 비서인 강경아 팀장(염혜란 분)이다.


강경아 팀장.jpg
▲ 구승효 사장의 비서로 등장하는 강경아 팀장
 

강 팀장이라는 캐릭터가 분량도 적고 극 중에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었던 이유는 캐릭터나 배우 자체의 이유보다도 그 캐릭터가 맡은 비서라는 역할 때문이다. < 라이프 >의 첫 방송과 맞물려 지난 7월 26일 종방한 드라마, < 김 비서가 왜 그럴까 >를 보면서 필자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허접한 연출, 작위적인 흐름과 유치한 대사, 뜬금없는 감정선 등 그 드라마의 단점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그 드라마가 ‘비서’라는 직업군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진 탓이 컸다. < 김 비서가 왜 그럴까 >는 ‘대기업 부회장 이영준(박서준 분)과 그의 9년차 수행비서, 김미소(박민영 분)의 로맨스’라는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한데, 그 사이 갈등이나 서사를 제쳐두고서라도 직속 상사와 수행 비서라는 수직적 관계는 로맨스로 끌고 가기 굉장히 조심스러워야만 하는 관계이다. 연인이라는 가장 사적이고, 서로가 동등해야 하는 관계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위계가 끼어들게 되면 어느 한 쪽의 존엄성이 무시되기 쉽기 때문이다.

원작이 무려 8년 전의 작품이고, 당시는 페미니즘이 지금만큼 주류가 아니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2018년 현재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 드라마가 막 첫 방송을 시작할 당시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이 그의 비서였던 김지은 씨에게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휘둘렀다는 고발이 있었으며 법적 공방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스러워야 할 판국에, 드라마 < 김 비서가 왜 그럴까 >는 비서라는 직업을 거의 ‘인형같이 예쁜 미인이 상사에게 넥타이 매 주는 역할’로 한정시킨 듯 했고,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를 오가는 이들의 사내 로맨스에 있어서는 안 될 위계를 은연 중 부여해 버리는 중대한, 거의 의도적이라고까지 느껴질 정도의 실수를 저질렀다.

사전적 정의의 비서는 중요한 직책에 있는 사람 아래에 속하여 그의 기밀문서나 사무를 맡아보는 직위를 일컬으나, 최근에는 윗사람을 수행하는 등 단순 보좌업무를 하는 이들까지 비서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수행, 보좌 등의 모호한 단어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비서는 프로페셔널하기보다 윗사람을 ‘돌보는’ 직업처럼 인식되는 일이 흔하다. 이같이 사람을 ‘돌보는’ 직업군은 보통 고루한 모성애적 관점에서 여성의 일이라고 분류되며, 보통 여초직업군으로 분류되면 직업의 전문성은 무시되고 성적 대상화가 만연하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간호사, 여교사 등도 이와 비슷한 노선에 있다. (알다시피 간호사는 가장 대표적으로 전문성이 무시된 직군 중 하나로, 그 명칭 또한 간호원에서 간호사로 바뀐 역사가 얼마 되지 않는다.)

드라마 < 김 비서가 왜 그럴까 >(이하 김 비서)와 < 라이프 >는 바로 이 점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 김 비서 > 속 김미소 비서는 제목에서부터 김미소가 아닌 김 비서로 등장한다. 그에게는 역대 비서 중 가장 지적이고 완벽하고 프로페셔널한 비서라는 설정이 주어지는데, 그런 설정이 무색하게도 그가 보이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라고는 초반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다혈질에 필요 이상으로 아이같이 구는 그의 상사 이영준의 비위를 밤낮 구분없이 능숙하게 맞추는 일이나 고작해야 넥타이 매 주는 일이 전부이다.

넥타이를 매 주면서 가까워진 거리가 유발하는 텐션은 두 사람의 사내 로맨스에서 쓰이기 제법 괜찮은 요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드라마 < 김비서가 왜 그럴까 >는 비서의 업무 자체를 넥타이 매 주기로 한정한듯, 로맨스가 없는 씬조차 넥타이를 매 주는 장면(과 거기서 오는 성적 긴장감)을 남용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기존의 성적 대상화된 비서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며, 비서라는 직군의 전문성은 흐려진다. 일례로 김 비서는 무의식 중에 관심도 없는 남자의 넥타이를 다짜고짜 매 주며 '직업병'이라고 얼굴을 붉힌다.


13.jpg
 

보통 이상의 능력치를 갖춘 캐릭터에게 흔히 부여되는, 고난과 역경을 통해 성장하는 미숙했던 과거를 김 비서 역시 가지고 있는데, 9년 전 비서 일을 처음 시작해 서투른 20살의 김미소가 '노력'하는 장면은 심지어 밤새 울며 넥타이 매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로맨스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을 때는 더욱 가관이다. 이영준은 “오빠라고 불러봐.” 라며 김미소에게 연장자로서의 권력을 내세우는 동시에, 김미소는 연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관계에서까지 그를 ‘부회장님'이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아랫사람으로 정체화한다.


14.jpg
 
 
반면, < 라이프 >에서 구승효와 강 팀장은 철저하게 일로 엮인 사이다. 드라마 내에서의 강 팀장의 분량이 김 비서의 분량보다 눈에 띄게 적은 탓에 일 하는 강 팀장 외의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었던 점도 있지만, 강 팀장과 구승효는 일에 있어서 찰떡같은 궁합을 자랑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일지언정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드라마 < 김 비서가 왜 그럴까 > 속 이영준이 자연스레 하대를 하고, 김미소는 (연인일 때조차) 그를 깍듯이 모시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또한 강 팀장은 갈등하는 구승효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어 조언하는 등 소신을 밝히는 장면을 통해 그동안 미디어가 다뤘던, '키링'처럼 매달려 있는 '여'비서의 전형을 벗어나며, 그의 탁월한 업무 능력은 구승효가 아닌 다른 인물들마저 그를 탐내는 모습을 통해 부각되기도 한다.


문소리.jpg
▲ 여성으로서 최초로 신경외과 센터장,
나아가 병원 원장의 자리까지 오르는 설정의 오세화
(문소리 분)
 

이밖에도, 드라마 < 라이프 >는 그동안 무시 당해왔던 간호사나 여성 의사, 여성 기자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모성애나 백치미가 아닌 전문성을 부여하고, < 여자 >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욕망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그려낸다.

최근 10대들 사이에서는 ‘도하나, 김하나 병’이 유행처럼 돌고 있다고 한다. 도하나와 김하나는 청소년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웹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인데, 두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껴 이를 모방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디어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인물과 관계에 대해 깊이 고찰할 에너지나 여유가 부족한 현대인들에게는 특히나 비교적 시간을 들여야 하는 서적이나 영화보다도 드라마같은 방송 매체들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람들은 매체에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왜곡된 이미지들 속에서도 스스로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필요한 정보들만 선택해서 수용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력은 이성의 수면 아래에서,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기도 전에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무조건 착한 사람만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물들이 전부 도덕책에 나올 법한 대사만 칠 수도 없다. 문제는 어떤 사람을 그리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비춰질지를, 내가 어떤 태도와 가치관으로 이 인물을 그려내는지를, 그리고 이 인물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가를 상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미디어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장르든간에 그 영향력을 잊어서는 안된다. 김미소 비서가 아쉬웠고, 강경아 팀장이 반가웠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채령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