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견고한 듯 투명한 내 주위의 육면체

글 입력 2018.08.2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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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색 단발머리에 노랑색 안경. 포스터 속에 그려진 소녀의 앙다문 입술과 또렷한 눈동자는 꽤 매력적이었다. 일단 시놉시스부터 읽어보았다. ‘덕 매카타스니는’, 굉장히 이국적인 이름이군. ‘아버지 휴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커콜디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나에게 굉장히 낯선 곳이다. 커콜디라는 마을은 말할 것도 없다. 검색을 통해 스코틀랜드는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북부 지방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휴의 증상이 심화되던 어느 날’, 다발성 경화증은 또 무엇인가. 한 번 더 검색창을 켜서 보니 다발성 경화증은 뇌, 척수, 그리고 시신경을 포함하는 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만성 신경면역계질환이라고 한다. ‘사회 복지사 린다 언더힐이 가정 방문을 할 것이란 사실이 통보된다. 덕은 자신이 보호시설에 넘겨질 것을 걱정하며 아버지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작전을 짠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덕이 짝사랑하는 로렌스가 나타나고 뒤이어 아그네사라는 여인까지 등장하면서 일은 꼬여만 가는데...’

시놉시스를 읽어보니 생소한 것 투성이다. 그리고 덕이 16살이나 되는데 설마 보호시설에 보내진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부녀간의 절절한 사랑만을 담은 연극은 아닌 것 같고... 내용은 시놉시스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사진 속 무대가 정말 신기해보였다. ㅁ자로 생긴 가운데가 뻥 뚫린 4면 무대, 그 가운데의 회전의자에 앉아 선택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몬스터 석. 내용부터 무대까지, 일반적인 연극은 아닐 것 같았고 그래서 이 연극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예상은 들어맞았고 ‘집에 사는 몬스터’는 철학적인 내용을 신선한 형식으로 나타낸 연극이었다.



캐릭터


이 극의 주인공은 스코틀랜드의 커콜디에 사는 16세 소녀, 덕이다. 덕이 3살 때 엄마가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녀의 이름은 엄마가 사고 당시 탔던 오토바이, 듀카티 몬스터에서 따왔다. 덕의 아빠, 휴는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 게임과 텔레비전 시청에 몰두하며 피자와 초코바를 거의 주식으로 먹고 종종 마리화나를 핀다. 집안에는 쓰레기가 쌓여있고 부엌엔 인스턴트식품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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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난한 한부모 가정의 씩씩하고 긍정적인 외동딸 설정은 약간 진부하다. 하지만 덕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그런 뻔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당당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데에서 오는 덤덤함, 차분함, 성숙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숙함이 어른들의 성숙함은 절대 아니다.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1시간 전에 일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할 때나 자신이 짝사랑하는 로렌스 앞에서는 감수성이 풍부한 10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로렌스는 덕과 같은 연극부 소속이며 옷에 관심이 많아 의상을 담당하고 있다. 덕의 말에 따르면 로렌스는 인기가 아주 많다고 한다. 이 세 배우 말고도 배우는 한 명 더, 극 중 역할은 2개 더 등장한다. 덕의 집에 예정된 방문을 하는 사회 복지사 린다 언더힐과 깜짝 방문을 하는 휴의 게임친구 아그네사는 남미정 배우님이 열연하며 이 1인 2역은 웃음&매력 포인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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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좌석


솔직히 극장에 들어가서 무대와 좌석을 봤을 때 굉장히 설렜다. 1층의 무대 가운데 좌석과 측면 좌석, 그리고 2층의 측면 좌석. 정면이 어딘지 정해져있지 않은 연극이라 정면 좌석이라고 할 수 있는 좌석은 없다. 그러니 각자 본 게 다를 수밖에 없다. 본 게 다르니 아무리 미묘한 차이더라도 극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무대 위에 좌석이 있는 관객석은 봤어도 4면 무대의 가운데에 좌석이 있는 건 처음 봤다. 무대 위의 관객석은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를 눈앞에서 보는 것을 최대 장점으로 여긴다. 몬스터 석은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몬스터 석에 앉은 관객은 마치 극 속에 들어간 듯 엄청난 몰입이 가능하다. 실제로 배우들과 상황들에 둘러싸여있기 때문이다.

나는 2층 좌석에서 모든 것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관람했다. 몬스터 석은 한 가운데 있기에 존재감이 상당했다. 사실 저 사람은 누구를 더 유심히 볼까, 어떤 배우가 더 많은 눈길을 뺐을까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또 몬스터 석은 회전의자다. 즉, 관객이 자신이 볼 장면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이 한꺼번에 일어날 때 한 눈에 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360도의 선택권은 어마어마한 장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좌석이 그냥 한 번 가운데에 설치해 본 좌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몬스터 석은 연출이 전하고자한 메시지를 좌석에까지 담은 것이다. ‘집에 사는 몬스터’의 임지민 연출님은 어떤 인터뷰에서 “무대 한 칸을 360도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공연을 보고 나가면서 관객 분들이 각자 자기중심의 360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길 바랐다.” “저 사람 위주의 주변이 있고 나는 내 위주의 주변이 있음을 깨닫기를 바랐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 연극은 부녀의 사랑만을 담은 연극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연극이다.



저마다의 우주를 육면체로


무대에는 아래의 사진처럼 가로, 세로의 구조물이 설치되어있다. 이 구조물로 인해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각형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또한 불필요한 구조물이 아니라 연출의 의도가 반영된 무대장치이다.

임지민 연출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제가 만난 수많은 상황들을 단순화시켜서 여섯 개의 면으로 봤고, 저는 한 인간을 육면체로 봤습니다. 그래서 그 육면체가 X축, Y축, Z축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도면 위에서 서로 만나기도 하고 끊임없이 못 만나기도 하고 끊임없이 함께 가기도 하고,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그런 세계를 무대화한 것 이와 같은 형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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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료 인간이 필요한 사회적 동물이지만, 자신만의 공간도 필요한 고독한 존재이다. 인간을 도형으로 생각하자면 면의 개수를 셀 수 없는 n면체, 혹은 3차원을 넘은 n차원일 수도 있는데 그걸 단순화해 6면체로 나타냄으로써 한정된 공간인 연극무대에서 메시지의 전달이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연극을 보다 보면 ‘띵~’소리가 자주 난다. 꽤 빈번히, 장면이 바뀔 때마다 들리기에 띵~을 왜 넣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한쪽 큐브에서 연기하고 멈췄다가 다른 쪽 큐브로 넘어가는 걸 노골적으로 인지시키기 위해 넣은 것 같다. ‘자, 지금 배우가 이쪽 큐브에서 저쪽 큐브로 이동할거야’를 보여주는 이 소리 또한 연출의 이러한 메시지를 구현하기 위한 장치인 듯하다.



몬스터는 무엇일까


초반에 몬스터가 오토바이의 이름인 줄 몰랐을 때는 ‘덕이 어딘가에 발을 부딪쳐 발가락을 아파하는 행위’가 뭔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 여러 번 나왔기에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발을 부딪치는 연기를 하기 때문에 이 행위도 파국의 요정과 비슷하게 덕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 사실 몬스터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을 할 건 아닌 것 같다. 발가락을 다치게 하는 것이니 덕이 더 큰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덕의 발목을 잡는 존재들 정도인 것 같다. 임지민 연출은 몬스터가 “집에서 인스턴트 식품만 먹는 아빠 휴를 표현하기도 하고 집 거실에 놓인 두카티 몬스터 오토바이를 통해 엄마의 죽음이 박제된 모습을 의미하기도 한다.”라고 했다. 더 중요한 건 극이 진행될수록 덕은 발가락을 다치는 횟수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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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었던 부분


- 그 장면이 나와 정면으로 있어서 그런지 덕이 충돌사고 나기 직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부분이 제일 임팩트 있었다.

- 배우들의 발성과 딕션이 매우 훌륭하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귓속으로 대사를 때려 넣어주는 느낌이다. 휴는 말하는 것조차 힘든 듯 발음을 뭉개며 말하는 것이 포인트인데 신기하게 대사가 다 들렸다.

- 하루일과가 시작하기 전 1시간 일찍 일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너무 잘 느껴짐과 동시에 하루일과 중에 글쓰기를 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므로 약간 안타까웠다. 덕은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조금은 자전적인 얘기라 말하며 주인공으로 프린세스 덕을 등장시키는데 그녀가 원하는 이상향적인 상황을 소설로써 풀어 쓴 것 같다.

- 연극에서 웃음포인트가 중요하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로렌스와 언더힐이 옷장에 들어가는 장면, 게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서 하는 대화, 아그네사와 언더힐의 1인 2역 등을 보며 웃으면서 극에 더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 사회복지사가 좋아할 만한 집안 풍경을 연출하는 장면에서 깨끗한 집안, 요리를 해주는 아빠, 종교 얘기 등등 덕이 생각해 낸 작전들은 재밌었고 휴의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어때서! 와 비슷한 맥락의 대사였다. 맞다. 행복하기만 하면 됐지, 지금껏 부녀가 살아온 평생을 사회복지사가 어떻게 몇 시간 만에 파악할 수 있냐! 이런 생각을 했지만 린다 언더힐을 그저 도움을 주러 온 것뿐이었다. 언더힐이 덕의 집에 방문한 이유가 기분 좋은 반전인 것 같다. 또 마지막에 덕이 죽은 줄 알아서 이 연극에선 꿈과 희망도 주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사실 죽은 게 아니어서 정말 좋았고 다행이었다.

- 엄마의 오토바이 사고를 묘사한 부분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3번인가 4번 나왔다. 똑같은 사건의 굉음인 만큼 많이 나온 이유가 있을 텐데 나는 이 극을 한 번 보고는 모르겠다. 또 극 초반의 시간 흐름이 일직선이지 않은 것 같은데 이 또한 한 번 보고는 잘 모르겠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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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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