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심야식당, 지루함 속에서 [영화]

글 입력 2018.06.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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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작업을 하면서 심야식당을 봤다. 밤에만 문을 여는 식당, 그리고 그 곳에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완전 소소한 일상물이었고 영화 자체는 지루한 편이었지만 나는 평소에 이런 장르를 선호하기에 남자친구에게도 시간나면 한번 보라고 했더니 자기는 일상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럼 액션이나 판타지는 어떠냐고, 요새 쥬라기월드가 나왔다고 했더니 또 자기는 판타지는 좋아하는데 쥬라기는 별로라고 한다. 정말 타협하지 않고 자아정체성과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다. 그 점이 늘 부러웠고 본받고싶었는데, 나는 어느샌가 그것을 '고집부리기'로 따라하고 있었다.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내가 잘못된 것도 인정하지 않기로 왜곡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쳐오고 있었다. 고집과 아집은, 확고함과는 비슷한 형태를 띄고는 있지만 전혀 다르다. 확고함은 그에 대한 정당한 근거도 갖추고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한결같이 행동할 수 있다. 고집은 정당하지도 않고 어린 마음에 제자리로 머무르려고 하는 억지이다. 고집만 가진 사람은 타인의 말을 수용하지 않아, 결국 주변을 맴돌던 타인은 떠나게 되고 연습할 상대를 잃어버리니 더이상 발전이 없다. 다른 사람이 다시 곁에 와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며, 자기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그저 '나'를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며 자기합리화를 할 뿐이다.

*

심야식당의 첫번째 이야기는 보험금 재산을 바람핀 남자에게서 물려받는 이야기다. 정당하게 자기 힘으로 돈을 벌라고 하는 주변사람들의 비난의 눈초리에도 여자는 결국 돈은 어떻게 버나 똑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아마 그 여자가 과거에 스파게티도 먹고싶은만큼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기에 더 그런 집착이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향 친구가 고등학생 때부터 악착같이 주말알바를 하며 돈을 버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 친구의 입버릇은 "돈이 최고야" 그러면서도 친구는 늘 돈이 없었다. 용돈을 받지도 않는 나보다 돈이 없다고 말한 것 같다. 이번에 같이 4박 5일로 중국 여행을 가기로 하고 1월부터 비행기표를 같이 예매했건만 일주일 전에 갑자기 자기 수중에 6만원밖에 없다며 나에게 여윳돈을 좀 꿔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의 우리는 아직 중국비자를 신청하지 않은 상태고 숙소도 제대로 예약이 안된 상태였다. 중국비자가 5만 5천원은 하니 그 친구의 돈은 5천원밖에 남지 않고 여행갈 재정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나도 학기를 보내면서 여행 준비를 위해 주2일 10시간동안 알바를 해서 겨우 100만원 가까이 모은 상태라 여윳돈을 마련할 수는 없었고, 그런 것보다는 그 친구에게 몹시 실망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그저 컴퓨터에 글자로만 쓰인 계획과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를 무의미한 노력에서만 끝이 났다. 그 친구는 나와 여행을 가고싶긴 했던 것일까? 사이가 조금 서먹해졌다.

스파게티를 보면서 또 내가 집착하는 음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예전에 스파게티라면 환장해서 늘 엄마에게 스파게티를 해달라고 조르고, 마트에만 가면 파스타면과 양념통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소개팅이나 특별한 자리는 늘 스파게티와 함께였다. 덕분에 학교 앞 스파게티 집의 맛이 어떻고 양이 얼마나 많은지는 잘 알고 있다. 항상 먹을 수 없다는 희소성과 제약이 집착을 낳는다. 다이어트, 식단조절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런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습관처럼 먹던 치킨과 피자, 떡볶이가 있는데 그걸 먹는대신 오이나 계란으로 배를 채우라고 한다. 그러면 배고프고 치킨이 생각나는데도 오이를 아삭아삭 씹고있다. 더 배가 고파지고 치킨이 더 생각나게 된다. 집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는 과자와 치킨을 엄청 싫어했다. 봉지를 뜯으면 얼마 나오지도 않고 맛도 공허하고 잇몸만 아픈 것을 왜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근데 다이어트를 하고나니 얼마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그리고 또 몸이 얼마나 많은 칼로리를 원하는지 남들이 먹다가 책상에 남겨놓은 꿀꽈배기를 그자리에서 다 먹었다. 그러고도 만족을 못해서 편의점에 들러 꿀꽈배기를 한봉지 사서 배부른데도 꾸역꾸역 입안에 다 집어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또, 내 손으로 치킨을 주문하는 건 두려웠는데, 남들이 먹다가 남긴 다 식어버린 대윤파닭의 빨강색 상자가 보였다. 저걸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게 머릿속에서 언어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온 정신이 버려진 대윤파닭의 상자에 초집중되어 있었다. 상자를 한번 열어보니 치킨이 꽤나 남겨져있고 양념도 종류별로 다 있다. 지난밤에 먹고 버린 거면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남이 먹던 건 좀 아니야, 하는 이성적인 생각에 내 설계실 자리로 돌아갔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대윤파닭뿐이다. 누가볼까봐 최대한 긴장해서 남이 버린 음식을 먹던 내 모습이 가련하고 불쌍하고 자존심상하고 더럽지만 음식의 제약에 미친 나는 그런 걸 신경쓸 여를이 없다.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놓칠 수가 없었다. 몇번이나 그 대윤파닭이 있는 화장실앞으로 가서 물만 마시고 돌아왔는지 모른다. 그러다 결심을 하고 화장실 앞으로 가서 이제는 어느 자리에 놓여있는지 생생한 대윤파닭의 상자를 열어 양념이 잘 발라진 닭을 한조각 꺼냈다. 누가 보면 안되니 손을 얼른 깨끗이 씻고 새끼손가락으로 화장실의 더러운 문을 걸어잠궜다. 반으로 갈라 입에 넣자마자 맛이 없어서 뱉어버렸다. 

나의 다이어트처럼, 가난하다는 것은 그래서 슬프다. 무언가를 하고싶고 사고싶다는 욕망은 타인과 동일한데, 경제적인 제약때문에 늘 좌절된다.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건데 그것에 정신적인 제한이든 경제적인 제약이든, 욕망에 제약을 주는 다이어트나 가난 등의 제한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기본적인 본능충족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본능을 벗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스파게티의 집착에서는 벗어났다. 남자친구덕분에 비싼 레스토랑에서 비싸고 좋은 질의 파스타를 여러 번 먹으면서 최상의 맛을 경험하기도 했고, 삼겹파스타라는 다소 신기한 메뉴를 접하기도 했으며, 남자친구의 집에서 남자친구의 정성이 담긴 파스타를 여러번 먹기도 했고, 내가 직접 파스타를 만들어먹기도 하면서 그 집착이란 게 사라졌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비뚤어진 애정이, 언제든 맛볼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니까 극복이 되었다. 더이상 예전처럼 파스타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음식에 대한 집착도 서서히 극복하고 있다. 폭식증이 너무 심해지기도 했었는데, 원하는 음식을 먹고싶을때 마음껏 먹으니, 다이어트를 끝내고 나니 오히려 먹는 양이 줄었다. 식탐도 사라졌고 입맛도 사라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폭식을 한게 무려 5일 전이니 엄청나게 나아졌다.(그 전에는 1일 1과식, 폭식에 가까웠다)

두번째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서 홀로 돈을 버는 '먹튀녀' 이야기. 먹튀를 하고 죄송한 마음에 가게로 돌아와 '마스터'의 손이 나을 때까지 요리를 보조하며 일하다가 '마스터'를 사랑하는 마담의 가게로 가게 된다. 여기서 기억에 남은 건, 친구의 부모님 장례식 때 자기가 친구에게 직접 해준 계란말이를 떠올리며 회상한 것이다.
어릴때부터 부모가 없었던 자신과 살면서 부모를 잃어버린 사람 중 누가 더 슬플까?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던 사람은 늘 남들과의 차이에서 오는 상실감을 느낀다. 어린이날, 각종 행사, 학교 등교날 모든 일상에서 부모는 존재하지 않고 상실 속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다. 있어야 할 존재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살면서 부모를 잃어버린 사람은 존재의 부재를 느낀다. 이때까지 있던 존재가 사라져버린 상실감이다. 상실감. 두 가지의 상실감을 같은 단어로 표현하였고 이는 분명 동일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품고있기에 비교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둘다 서로의 고통을 절대로 알수는 없으며, 누구나 두 가지 중 하나의 고통을 겪는 것이 인생이다. 끝없이 부모의 존재를 상상하고, 타인에게 '고아'라는 말을 듣는 평생의 슬픔은 사실은 소중한 이의 부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이라서 상실감이라는 단어로 이렇게 동일하게 표현하는 것조차 실례다.

늘 있던 사람이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이다. 2년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3일 내내 울었다. 타지 생활을 하느라 6년간 키운 고양이가 죽은 것도 그 때 같이 알았다. 내가 알던 사람이, 더군다나 2주에 한번은 함께 병원에 가던 할아버지께서 더 이상 체온도 없고, 생각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몸은 그대로인데 눈은 감고있어서 자는 것만 같은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죽은 거라고 믿을수가 없었다. 장례사가 마지막으로 만져보는 시간을 준다고 할 때 겨우 손을 올려 할아버지의 귀를 만졌다. 생전 할아버지의 귓볼처럼 보들보들한데 차가웠다. 다른 곳은 차마 더 만질 수가 없었다. 외할아버지를 보내던 마지막 날, 그 육신을 불쏘시개처럼 태워버릴 때는 또 얼마나 슬프던지, 장례지도사가 그만울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고 가마로 가는 그 관을 막고 싶었다. 시간이 지난 후 그저 작은 하얀 알갱이들이 되어 나온 할아버지의 유해를 봤을 때도 많이 울었다. 사실은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때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아서 울음이 터져나온다. 시간이 지나서 그 상실의 아픔을 극복해가는 줄 알았는데 2년은 상실의 아픔을 낫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나보다. 그 일이 있은 후, 늘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났고 6개월간은 자취방에서 불을 끄고 혼자 울거나 무기력하게 아무생각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심각한 우울증이었고 아직도 습관적인 우울증이 진행 중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었던 이의 상실감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건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종류의 슬픔일 것이기에 말을 줄인다.


[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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