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써클 : 90분 카레, 차별 맛 [영화]

특대 절구통
글 입력 2018.06.0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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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클
: 살인 마피아 게임.


※ 스토리 진행에 있어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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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협소하고 컴컴한 공간으로부터 시작된다. 값싼 제작비에 제작진들이 쌍수 들고 환영했을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한 명이 정신 차린다. 다들 영문을 모른 채 낯선 공간에 끌려와있다. 하나 둘 깨어나고 소리치고 난리다. 혼란한 상황 속, 2분마다 한 명씩 무작위로 죽는다. 시체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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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마다 한 명씩 죽는다. 다수결로 인해 지목받은 사람도 죽는다. 발판 원에서 떨어지면 즉사. 남을 터치해도 즉사. 혹자는 살인 마피아 게임이라고도 하기도 한다. 물론 진짜 죽는다는 것과 마피아가 게임 밖에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50명의 사람들이 다 죽어나빠지는데 1시간 반도 안 걸렸다.

갇힌 협소한 공간, 제한된 행동, 산발적으로 죽어 나가는 주변 사람들.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을 것이라. 러닝 타임 동안 진짜 말도 안 될 만큼 죽기 위한, 온갖 잣대를 들이대며 자기들 멋대로 지껄인다. 대외용 자신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평소 무의식에 잠재되어있던 온갖 차별이 가시화된다. 그것도 삼십 분 만에 우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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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차별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인종, 성격, 성별, 나이, 종교, 성적 지향성, 국적, 장애, 직업….

50명의 사람들은, 바꿔 말하자면 50개의 차별과도 같았다.

심각한 상황과는 다르게, 서사가 급전개되다 보니 시트콤 같았다. 처절함만 빼자면 차별을 풍자하는 프로그램 같기도 했다. 워낙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차별들과 모르고 있던 차별들을, 목숨이 달려있다는 경각심 때문인지 가감 없이 드러내며 서로를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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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웃긴 건 선을 표방했던 주인공도 결국 선을 이용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위선자였다는 건 뭘 시사할까? 어린아이, 임산부, 태아를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악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남자는 그저 살기 위해 행동한 것이다.

영화에서 아이와 임산부도 결코 착하게 연출되지 않는다. 그 점이 인간적이라서 더욱 현실적이었다. 물론 마지막에는 아이가 자신을 희생해 임산부, 정확히 태아를 살리려고 하기도 했다. 그 배경엔 남자가 아이로부터 하여금 임산부를 살리도록 유도, 종용한 것도 배제할 수 없다. 순수한 마음으로부터의 희생이라고 칭하기 무리가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들도 살기 위해 행동한 것이며, 남들이 자기를 위해 희생하려고 할 때 묵인하면서 편승한 것이다. 매정한가 싶기도 하지만 비난받지 않으며 남들이 살려주겠다는 데 굳이 나서서 막을 필요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라고 아이와 임산부보다 살고 싶은 마음이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런 의견을 피력한 사람이 있었다. 그저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당위를 이용해서 살아남은 거지만, 그것 또한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살기 위해 했던 행동을 비난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점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차별은 치지도외하자. 차별은 있어선 안 된다.)

당위라는 것도 사회가 정해놓은 약속이니까. 특별히 아예 아이와 임산부 등등은 살려야 한다고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 말 없이 전제했던 다른 영화는 너무나 교과서적이어서 현실감 없었다. 써클은 사각지대를 조명해서 좋았다. 물론 살기 위한 검열을 한다는 듯이, 임산부와 아이를 도마 위에 올리고 바로 앞에서 갑론을박 벌이는 모습은 역겨웠지만 일단 그들도 최대한 살려면 임산부와 아이를 먼저 죽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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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놀랐다. 일례로 타이타닉을 보자. 위급한 상황에서 여자와 아이 먼저 살려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있다. 먼저 혼자 살아남으려는 사람을 비난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연출한다. 하지만 '써클 (2015)'은 다르다. 비록 써클은 좀 더 자극적이며 서로를 간접적으로라도 죽고 죽이게 한다는 상황에 놓여있지만, 둘 다 목숨이 걸려있다는 상황은 같다.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에서는 조금 더 개인주의화가 진행됐다는 점이며 여자라고 특별히 살려주려는 노력이 희미해지거나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연출일 뿐이더라도 위급 생존 상황에서 여자를 살려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는 것은, 이미 여자가 약자가 아니라 하나의 개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일컫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고 스스로 의견을 피력하는 개인이 된 것이다. 물론 아직 한참 멀었지만, 적어도 연출에서는 그렇다.

아쉬웠던 점도 있다. 내용은 드러나지 않지만 연출이 아쉬웠다. 아이와 임산부 둘 다 여자로 그려졌다. 연출이 아무 생각 없었을 수도 있다. ( 그렇다면 더 실망스러울 것이다. ) 생각해보자. 기사에서 '여'라는 접두사를 붙은 대상은 셀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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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지켜줘야 할 대상을 여성의 이미지로 연상하는 게 자연스럽기 인식되기 때문에 여성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피해자와 여성은 분리할 수 없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특히 여학생, 소녀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이다. 상처 받은, 가녀리고 안타까운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소녀를 투입시킨다. 여태까지 쌓여온 관념으로 여성에게 피해자 이미지를 투영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보호받을 존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운 반영이다. ( 웃긴 건, 그런 이미지를 투영시키면서 강간, 살인 등의 범죄에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며 온갖 관심을 그쪽으로 몰아간다. )

아니면 그런 점을 꼬집기 위해서 둘 모두 여자로 연출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의도된 연출이라면, 하트를 보내고 싶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면, 한 무리 사람은 어린아이, 임산부 몇과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양분해서는 안되지만 굳이 따지자면 우리가 선과 악으로 일컫는 세력들이 비슷하게 포진되어 있다. 정답은 없으며, 선과 악도 없다는 것 같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선을 조명한 것보다 악을 조명한 이유는 처음에는 일단 재밌고 뻔하지 않은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 중요한 이유는 그런 건 문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산부와 아이가 살기 위한 당위를 가진 것처럼, 아닌 사람에게도 당위를 부여해주는 것 같다.

의아한 점이 있다. 외계인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외부 세력의 영향으로 살인 게임이 시작됐다. 직접적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데 점차 관심은 그들에게 멀어지는데 서로 물어뜯는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들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 말고 인간을 조명한다. 뭔가 우리네 사회를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작 분노를 내야 할 대상은 멀리 있는데,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표출하는 것이다. 이를 굴절 혐오라고 칭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사실 차별의 주체라고 생각하면 분노의 대상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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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게임의 목적을 대략적으로 추측 가능하다. 외계인은 다민족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최대한 다양한 인간들을 포괄하는 표본 집단을 선정했으며,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사회 단면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개미들의 사회를 연구하는 것처럼. 역겹고도 웃길 것이다.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아주 생난리를 치는 것이. 마지막에 외치는 주인공 모습을 보면서 한심하기도 했다. 그들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실험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조금씩 멈췄다가 다시 재생했다가 하면서 봤다. 그런 차별들이 난무하는 영화를 마음 편히 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며, 숨 막히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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