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 밤의 독백_김애란 단편집, 『바깥은 여름』 [도서]

훌쩍 찾아든 여름을 맞으며
글 입력 2018.06.0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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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의 독백 

너무나 갑작스럽게 여름이 성큼 다가와버렸다.

급한 일이 끝나고, 오랜만에 받은 휴가 날. 무척 오랜만에 해가 쨍쨍한 낮 시간에 집을 나섰다. 그런데 왠 걸, 아침 저녁에 느꼈던 선선한 바람은 다 어디가고 뜨거운 열기와 내리쬐는 햇빛이 나를 반겼다. 지극히 평범한 여름 낮의 풍경이었다. 순간 나는 길 위에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갑작스런 더위의 급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요 근래 나는 항상 집, 회사, 집, 회사의 루틴을 반복했고, 이 단조로운 패턴 속에서 바깥 공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곤 출퇴근 시간, 아침과 저녁이 다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낮 시간에 찾아온 이 더위의 존재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여름 때문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제모도 해야 하고, 바캉스 계획도 짜야하고, 남들이 놀 때 너무 일만 했나 싶어 약간의 회의감도 들고……. 이렇게 마음만 바쁜 와중에 문득 책장 한 구석에 던져두었던 책 한 권을 꺼냈다. 『바깥은 여름』. 일전에 이 날과 비슷하게 휴가를 받은 날, 낮 시간에 서울역을 지나다 기분이 좋아서 덥석 사버린 김애란 작가의 소설이다. 파란 표지에 약간은 서늘한 이미지를 가진 이 책의 제목을 빤히 들여다보다 조용히 제목을 되뇌었다. “바깥은 여름, 이거 딱 내 상황인데?” 나름 바쁘게 사느라 여름이 오는 줄도 몰랐던 나의 상황과 책의 제목이 묘하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고등학생 때 읽은 『두근두근 내 인생』, 대학생 때 (물론 지금도 대학생이다) 읽은 『달려라 아비』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김애란 작가의 소설이다. 추파(秋波)란 단어를 ‘가을 물결’로 풀어내어, 부정적인 의미를 단어를 감성적으로 재정의하는 등 도끼로서 책의 기능을 전면 활용하여 도끼를 쾅쾅 내려치는 김애란작가는 이번에도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 시간은 흘러가지만 여전히 어느 한 순간에 붙들려 제자리에 멈춰선 인물들의 서늘한 이야기들, 각 이야기들이 품고있는 서늘함은 여름 밤에 느껴지는 오싹함과 닮아있다. 그 감정은 서늘하지만 날카롭고, 날카롭지만 슬프다. 떠나간 아이를 놓지 못하는 부모, 한 순간의 이기심에 떠나 보낸 반려견의 기억에 얽매인 아이, 오랜 시간 함께했던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 등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엔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 사실 단편에 대해 하나 하나 논하는 방식이 아닌 이상, 단편 소설집에 대해서는 잘 감상을 엮어내지 못하는 나지만,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모두들 어느 한 순간에 매여있다는 점, 그리고 그 순간이 약간은 날카롭고 아프며 서늘하다는 점이다.

책 뒷 표지에 이런 말이 있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시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겨울을 맞지만, 누군가는 여름에 여전히 묶여있다. 그 시차의 간격은 아무도 모르지만 정확한 사실은 그 누군가를 묶여놓은 기억이, 상처가, 모두 서늘한 여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약간은 서늘하고 약간은 아프고 약간은 날카로운 그런 느낌을 말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여름의 서늘함이라는 반어법은 꽤나 신선했다. 겨울의 함박눈은 포근하고 여름의 밤은 시원하다. 보통의 여름이 열정적이고 활기찬 이미지라면, 보통의 겨울은 황량하고 외롭고 스산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런 특징을 가진 계절들이기에 사람들은 더 시원하고 서늘한 것을 찾고, 더 포근하고 따뜻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여름의 서늘함과 겨울의 포근함이 완성된다. 책을 읽어갈수록 어렴풋이 그려지다 책을 덮을 때 딱 깨닫게 되는 일종의 아이러니다. 더불어 ‘안’이 아닌 ‘바깥’이 여름이라는 표현 역시도 마음에 들었다. 보통 세상이 나를 스쳐 지나갈 때, 우리는 멈춰져 있는 기준을 ‘나’로 세우지 않는가.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기준은 ‘나’가 아니라 그런 ‘나’가 바라보는 세상이다. 여름에 머물러 있는 나의 바깥 세상은 여전히 여름이다. 많은 것들을 흘려 보내고, 변화를 시작 해야 한다는 인식은 겨울로 흘러가더라도, 여전히 여름에 머물러있는 나의 진심은 바깥 세상을 아직 여름에 붙들어놓는 셈이다.

내가 이 소설을 집어든 이유는 단순했다. 말 그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깥에 여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안에서 여름은 그런 단순한 여름이 아니었다. 인생에서 강하게 나를 스치고 간 기억, 그 서늘함이 이 책의 여름이었고, 나는 한 순간 단순했던 나의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특정한 시간에 머무르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나 역시 그렇게 특정한 순간에 매여 힘겨워하던 때가 있었기에, 무언가를 흘려 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절실히 알고 있다. 특히 사람들을 묶어두는 그 순간이 가족, 연인, 친구 등 소중한 사람과 연결되어있다면 그건 정말 벗어나기 힘든 굴레가 된다. 이 소설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상과의 시차를 가진 사람들……. 만약 누군가 이런 시차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다들 그런 시차를 누구나 한번쯤 겪는다고, 그리고 그 시차는 결국 세상의 시간과 맞물린다고, 그리 말해주고 싶다. 서늘한 여름 밤, 창 밖 여름 공기를 느끼며 글을 마친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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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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