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알아채지 못하는 공포에 대하여 - [연극] 공포

글 입력 2018.05.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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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감은 늘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모르고 지나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공연을 본지 약 일주일이 지난 지금, 처음 연극을 보고 나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을 정리해보고 앞선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이상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나아가는 과정이 가진 의미는 알지 못한다. 드미트리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당신은 이것이 이해가 가는가? 그저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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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마 태어나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놈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면 .. 그렇다면 당신에게 축하를 드리지요. 내 눈에는 사방이 컴컴해보여요”

  
농부는 그저 농사를 짓는 것이 일상이다. 그것이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며 행동에 목적 따윈 없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조차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농부가 마치 나와 같음을 느꼈다. 무엇인가 하고 싶다, 이루고 싶다 혹은 명확한 꿈이기에 이것을 목표로 달리겠다. 24년간 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 없었던 걸 보면 드미트리가 말하는 하찮은 농부와 나는 딱히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드미트리가 말하는 ‘이해’라는 것을 하며 살아가지 못한다. 그런 의문에 대한 틈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어쩌면 쥐의 썩은 냄새를 맡고, 이명이 들리던 그, 자신만이 순간의 공포를 느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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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극의 상황과 대사를 곱씹어 보면 그저 나의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 자체의 일이었다.

극의 초반에는 조시마 신부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가브릴라 아버지의 아픔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며 그는 죄책감을 느낀다. 가브릴라를 찾는 목소리에 신부는 그를 찾으러 다니지만 찾을 수 없다. 이때 신부는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든다고 얘기한다. 결국 자신은 죽어가는 그에게 가 자신이 가브릴라 인척을 하며 그를 떠나보내게 된다. 신부가 얘기한 그 두 가지 감정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죄를 짓고 살아간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행동이든,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든. 그래서 늘 불안하다. 혹시나 그 죄가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면 어쩌지? 그렇게 내 죄에 마주하고 누군가에 의해 알려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 안도감은 그 두려움에 대한 마지막 합리화라고 느껴졌다. 조시마 신부가 자신이 가브릴라인 척 연기를 했던 것도 그의 아버지를 어쩌면 편안히 떠나보내기 위함이었다고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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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진행되어 가면서 드미트리는 가브릴라에게 하나의 시험을 한다. 술을 끊기로 약속한 그에게 좋은 포도주 10병을 선물한다. 만약 그가 하나를 남기게 된다면 자신의 집에 있도록 허락하겠으며, 10병을 모두 마시지 않는다면 그와 사랑에 빠졌던 까챠를 다시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그는 제안을 수락하고 자신의 포도주를 창고에 가둬놓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을까? 까챠가 자살을 한 이후 결국 포도주를 뜯어 마셨다.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그가 포도주를 뜯었을지 모른다. 그가 욕구를 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짐작한 바였다. 사람은 자신의 충동과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충동을 꺾지 못하며 습관은 노력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의 나약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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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는 왜 그를 시험에 들게 했을까? 이 내기를 제안하는 과정에서는 40인의 순교자 이야기가 나온다. 40인의 병사가 배교에 반대하여 얼음 물에 들어가도록 강요받는다. 그중 한명이 베교하여 따뜻한 물로 들어가지만 결국 죽고 만다. 하지만 이교도 병사가 개종하여 자신이 얼음 물에 들어가 결국 39명에서 40명으로 순교자를 맞추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질문한다. 배교를 택한 한 명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는 순교를 위해 3일 동안 얼음 물에서 참고 견뎠다. 하지만 견디다 못해 따뜻한 물에 갔더니 그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다. 그가 견딘 3일은 헛된 것인가?

인간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온다. 내가 따뜻한 물로 갈 것인가? 혹은 포도주를 딸 것인가? 신은 그들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는다. 모든 결과와 책임은 인간 자신이 진다. 그들이 감당하여야 하는 결과는 공포 그 이상의 것일지도 모른다. 신과는 대조되는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난다. 죄를 짓지 않았지만 고통받는 인간은 신에게 죽기 전 다음 생엔 자신이 정말 죄를 짓게 해달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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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챠의 죽음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죽음이 그렇고, 자살이 그렇다. 가브릴라에게 술값으로 돈을 바치고 길거리 신세가 된 그녀. 그를 ‘동정’ 없이 보낸 마리. 그녀가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굳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드미트리. 어쩌면 그저 이 모든 상황의 방관자로 존재하는 체홉.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마리가 무자비하게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에 까챠가 죽었다는 생각은 일차원적이다. 죽음은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을 뿐.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
 
체홉이 사할린으로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극에서도 사할린은 신이 버린 곳으로 묘사된다. 그런 최악의 공간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어쩌면 그런 공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마지막의 모습이자 본 모습을 그대로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공포>를 보며 인간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공포라는 감정에 대해 이렇게 서사적으로 묘사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인상깊었던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은 나의 한 모습이었고 그렇기에 너무나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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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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