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감각에 의한? 감각을 위한? : 연극 < 처의 감각 >

연극 < 처의 감각 > 리뷰
글 입력 2018.04.1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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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해체하기

  
인간이 늙듯 이야기도 ‘낡는다’. 어쩔 수 없다. 이야기는 시대 인식을 담지하기 때문에, 시대가 변할수록 인식의 한계는 또렷하게 드러난다. 5년 전 무리 없이 낄낄대던 그때 그 예능 프로그램도, 손목을 거칠게 끌고 가는 모습을 설레게 연출했던 그때 그 드라마도, 강한 남자 주인공이 착한 여성 캐릭터를 구원해주던 그때 그 공연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다시 말하자면, 모르고 넘어갔던 그때 그 시간엔 그게 맞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지금으로선 틀릴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의 인식이 한 뼘 두 뼘 자라날수록 틀린 것은 수북이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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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먼 옛날의 신화는 작가들의 주요한 글 창고다.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는 신화가 곧 상상력의 시원이라 이 말이다. 5년 전, 10년 전의 이야기만 해도 낡은 내가 폴폴 나는데 어떻게? 신화의 비일상성, 환상성, 초자연성은 곧 인간에 대한 메타포로서, 인류 보편의 상징체계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고, 세계의 배후를 가리키고 있기에 먼 과거의 신화는 현재의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자기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도 자신의 아이를 죽인 메데이아도 현재의 인간사와 닿을 수 있는 이야기의 원천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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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원천으로 삼은 우리 시대 희곡 작가로는 고연옥이 대표적이다. 작가 고연옥은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동시대 문제를 고민하는 작업을 해왔다. 고연옥의 작업은 대체로 이렇다. 있는 그대로의 신화적 상상력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고, 신화를 해체하여 현재의 시각에서 다시 쓰는 것. 그의 필치는 남산예술센터 첫 시즌 프로그램으로 오른 <처의 감각>에서도 여과 없이 발휘된다. <처의 감각>은 웅녀와 곰 신화에 착안하는데, 출발은 자식을 죽인 암곰 이야기에서부터다. 자기 자식을 죽인 여자의 이야기는 암곰 이야기와 메데이아, 그리고 현대의 실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작가 고연옥은 이들의 행위에서 ‘약자성’을 읽어낸다.
 
 
 
돌아갈 수 없는 곳, 돌아가려 하는 사람들

 
<처의 감각>에서 가장 먼저 읽히는 건, 인간 존재의 회복 불가능성이다. 곰 아내도 그의 남편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한다. 곰 아내가 곰에게 돌아가려다가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문명의 세계로 진입한다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앞으로 나가려던 남자는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과거를 뒤돌아보게 된다. 희곡의 전체적인 틀도 이와 조응한다. 동굴-기차역-도시-기차역-동굴이라는 구성의 동일성은 회귀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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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없는 현실과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 그 중심엔 세계의 폭력이 있다. 곰 아내가 곰을 버리고, 노인이 곰 아내를 유린하고, 사회가 남자를 몰아넣고, 결국 남자는 곰 아내를 버리고, 곰 아내는 자식을 버린다. 인간을 집어삼킬 듯한 기울어진 벽면 오브제는 이 연쇄적인 세계의 폭력을 형상화한다. 특히 곰 아내가 진입한 문명의 세계에선, 강자가 약자인 체 가면 놀이 하다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그곳엔 곰의 냄새만 날 뿐, 곰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약자는 안 보이지만 수많은 약자가 실존하는 사회. 그러다 좀 더 강한 약자가 좀 더 약한 약자를 먹는 사회. 이곳에선 사람에게 배신당한 노인이 자신보다 약자인 곰 아내를 짓밟고, 남자에게 ‘서비스 불만족’을 줄 수 있는 사무실 경리는 누군가의 커피를 타고 복사 심부름을 해야 한다. 여기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인간들은 어딘가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이미 출발한 기차처럼 정해진 길만이 눈 앞에 펼쳐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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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권력 관계와 회복 불가능 속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작가 고연옥이 말하고자 한 궁극이었다. 남자가 처자식을 버리고 인공의 순수 박물관으로 떠난다면, 곰 아내는 아이들을 죽인 후 자신의 ‘아내’를 찾아 동굴로 떠난다. 남자는 잃어버린 ‘나’를 찾겠다며 떠나고, 곰 아내는 ‘처’의 감각 즉 약자의 감각을 찾으며, 태초의 약자였던 곰에게로 향하는 거다. 곰 냄새처럼 흔적만 남은 약자의 감각, 우리가 자기 자리를 찾고자 뿌리쳐 버린 약자의 감각. 작가 고연옥은 <처의 감각>을 통해 그 감각을 복원해야 하며 이를 복원하는 여정은 인간 본성의 불가해한 측면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각이 뭔가요

 
자, 지금까지 희곡 <처의 감각>의 이야기였다. 아, 오해하진 마시라. 연극 <처의 감각>은 희곡 텍스트를 충실히 따른 편이니. 선문답 같은 대사와 작품 전체를 감싸는 관념적인 언어 역시 그대로 무대화했다. 연출과 작가의 텍스트 해석이 부딪치는 일도 없었다. 글쎄, 근데도 이 감각을 모르겠다. 희곡에선 읽히는 상징체계가 무대에선 읽히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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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 연출은 <처의 감각>에 해학성과 역동성을 부여했다. 무용수인 윤가연 배우를 내세워 몸짓 언어를 구축하는 한편, 일렉트로니컬한 음악으로 작품의 톤을 다양하게 펼쳐 보인다. 첫 장면부터 불이 다 꺼지지 않은 객석에서 곰 아내가 등장하며, 여타 배우들은 등장하지 않는 씬에도 객석에 앉아 추임새를 넣는다. 공연 중간엔 객석 조명을 모두 밝히며 연극을 이어나가는데, 마당극같이 느껴지기도 하더라. 연극엔 ‘<처의 감각>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여실히 보이며, 그 답으로 내놓은 실험적인 연출은 퍽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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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같은 연출의 감각은 고연옥 특유의 상징체계를 가려놓는다. 텍스트는 관념적이고 붕 떠 있기 때문에, 구조적 상징을 분명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끝내 말하고자 했던 약자의 감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새롭게 접근하려는 연출의 감각은 상징체계를 읽지 못하게 만들고, 몰입감을 저해하기에 이른다. 특히 남자의 전 여자친구의 등장장면은 과장된 발레 동작(혹은 새의 형상화?) 때문에 도리어 대사가 난삽하게 느껴진다. 작품의 핵심은 후반부 곰 아내와 남자의 선택에 있건만, 이것저것 새로운 감각들의 연속과 2시간의 압박 속에 집중력이 흐려져 중심이 안 서는 거다. 텍스트가 분절되고 붕 뜬 대사만 남으니, 공연장을 나오며 그래서 도대체 약자의 감각이 뭐야? 하고 묻고 싶어지더라.
 
 
 
감각을 위한, 감각에 의한

 
연극 <처의 감각> 속 연출의 감각은 신화와 <처의 감각> 사이, <처의 감각>과 관객 사이의 대화를 저해하는 편에 가깝다. 물론 이 같은 시도는 새로운 무대를 위한 실험이며 도전이겠다. 빈 무대에 연출적 요소를 가득 채운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 아니던가. 마음 같아선 이런 도전에 어렵다는, 난해하다는 비판보단 기대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2시간 동안 꼼짝없이 헤맸으니 이것도 무리인 모양이다. <처의 감각>을 위한 감각이 필요한 것이지, 감각에 의한 감각만으론 관객을 이끌고 가기 쉽지 않다. (헤매는 와중에, 배우 황순미의 눈빛과 연기엔 다음 장면을 지르밟게 해주는 에너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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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부디 다음에는, 신화와 현실의 알레고리를 담지하는 고연옥 작가의 감각도, 파격과 신선함을 추구하는 김정 연출의 감각도 한데 잘 어우러져 뛰어난 감각의 작품을 만들어냈으면 한다. 상상력의 시원인 신화는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기에, 동시대는 약자가 살아남기엔 힘겨운 세상이기에, 캔버스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넣으려는 창작진의 노력은 언제나 반갑기에.



■ 참고
김성희, 「고연옥 희곡의 신화적 상상력과 해체적 신화쓰기」,
『드라마연구』 51권, 한국드라마학회, 2017.

■ 자료제공
남산예술센터, 남산예술센터 트위터






예매하기



INTRODUCTION
 

■ 공 연 명 : <처의 감각>

■ 기    간 : 2018년 4월 5일(목) ~ 4월 15일(일) (월요일 공연 없음)

■ 시    간 : 평일 오후8시 / 주말 오후3시

■ 장    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 주    최 : 서울특별시

■ 주    관 : 서울문화재단, 프로젝트 내친김에

■ 제    작 : 남산예술센터, 프로젝트 내친김에

■ 관 람 료 : 전석 30,000원 / 학생 18,000원

■ 관람연령 : 만13세(중학생)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 120분



CREATIVE STAFFS
 

■ 출    연 : 윤가연, 백석광, 이수미, 최희진, 황순미, 임영준, 최순진, 권겸민, 김정화


■ 스 태 프
작(고연옥), 연출(김정), 무대(김은진), 조명(신동선), 의상(김우성), 분장(백지영),

사운드(지미 세르), 움직임(권령은), 사진(이강물), 영상(박태준), 무대감독(김성철),

조연출(박정호), 기획 어시스턴트(윤영은), 프로듀서(조하나), 인쇄물디자인(디자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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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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