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아저씨' 혹은 '나와 아저씨' [문화 전반]

인간, 슬픔, 구원
글 입력 2018.04.0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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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방영 전부터 드라마 제목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드라마 제목에서부터 중년 남성과 어린 여성의 로맨스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막상 1화가 반영되었을 땐 데이트 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3, 4회 방영 후 <나의 아저씨>는 잇따른 호평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CJ E&M과 닐슨코리아의 발표에 의하면 3월 4주(3월19일~3월25일)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콘텐츠파워지수(CPI) 1위로 진입하며 화제성을 입증했다. 한창 논란이 있었을 때, 극중 ‘지안’역을 맡은 이지은이 브이라이브에서 “조금만 더 지켜봐 달라”고 했던 인터뷰처럼, 회가 거듭될수록 <나의 아저씨>는 탄탄한 대본, 디테일한 연출과 공감대 형성으로 시청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주인공 지안과 동훈은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특히 동훈과 적대 관계여야 편할 지안이 자꾸만 동훈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지안은 동훈을 파멸시켜야 거액의 빚을 해결할 수 있지만, 동훈의 일상을 도청하며 빈틈을 찾기는커녕 자신과 비슷한 삶의 조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동훈의 ‘착한’성품도 한 몫 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지안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시청자들은 주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안과 동훈의 비슷한 삶의 조각은 어떤 모양일까.



1. 칼과 망치 : 가족



“내가 무슨 모욕을 당해도 
우리 식구만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근데 어떤 일이 있어도 
식구가 보는데서 그러면 안돼.

식구가 보는데서 그러면 
그땐 죽여도 이상할 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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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주로 불완전한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삼형제 중 큰형(상훈)은 회사에서 쫓겨난 신용불량자이며, 막내(기훈)는 실패한 영화감독이고, 그나마 동훈이 대기업에 다니지만 그마저도 위태로울 뿐더러 아내와의 관계도 흔들리고 있다. 지안의 가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캐릭터 설명에 따르면 지안은 여섯 살 때부터 결손 가정에서 자랐고, 지금은 거액의 사채 빚에 시달리고 있다. 할머니의 요양비를 감당하지 못해 몰래 병원을 탈출했지만, 창문 밖으로 달도 볼 수 없는 작은 집의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판이다.

동훈과 지안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바로 ‘지키고 싶은 최후의 것’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가족'은 동훈과 지안이 서로의 삶에 연민을 느끼는 계기로 작동하며, 이는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선물하는 발판이 된다. 특히 4화에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지안과 동훈이 각각 ‘칼’과 ‘망치’를 들었던 장면이 대비되었는데, 이 둘에게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칼과 망치라는 무기의 (잠재적)폭력성은 그렇게 해서라도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그들의 절박함을 반증한다.

한편 이 장면에서 대비되는 지안과 동훈의 선택은 어른과 아이의 차이를 부각한다. ‘어른’인 동훈은 자신의 가족들을 괴롭게 한 건물주를 심판하기 위해 망치로 ‘건물’을 찍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동훈은 전문 기술을 보유한 구조 기술사였기에, 분노의 감정을 추슬러 다른 방식으로 저항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였던 지안이 ‘칼’을 들어 '사람'을 찔렀던 이유는 동훈과 달리 감정을 추스를 시간도, 전문적으로 대항할 기술이나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2. 동정과 슬픔 사이 : 위로



"너희들은 걔 안 불쌍하냐?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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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에서 지안은 동훈을 이해하기 전에 경멸했었다. 동훈의 일상을 도청하던 지안은 동훈이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사실은 사람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다른 동기로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도’ 한다. 아마 지안은 후자의 방향으로 동훈의 마음을 해석했을 것이다.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들며, 그렇게라도 자존감을 높이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려는 마음. (도스토옙스키의)<악령>에는 사람들이 남의 불행으로 자기 행복을 확인한다는 말이 나온다.”

-책 <무엇이 인간인가> p.112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한 인간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였다.”

-책 <쇼코의 미소> p.26


이 두가지 책 구절은 지안이의 태도를 변호하는 문장이다. 그래서 동훈의 말 때문에 분노하는 지안을 ‘동훈의 마음을 오해해서’라고 설명할 순 있어도, ‘지안이 마음이 꼬여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위로하려는 마음 안에 담긴 인간의 의도가 백프로 순수할 수 없다는 인간성 때문이다.


"나만큼 지겨워 보이길래.
성실한 무기 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여기서 제일 지겹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
나만큼 인생 거지같은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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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날 알아"

"좋아?"

"슬퍼."

"왜?"

"나를 아는게,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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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4화 말미, 동훈이 동생 기훈에게 지안이 자기를 잘 안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말할 때 지안은 전과 달리 완전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동정과 슬픔은 다르기 때문이다. 동정과 슬픔은 둘 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동정은 가여운 이와, 가엾게 여기는 이를 구분하는 반면, 슬픔에는 오직 슬퍼하는 이밖에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슬픔은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만든다. 동훈의 슬픔도 마찬가지로, 이미 동훈과 지안, 둘을 서로 더 나을 것 없는 동등한 존재로 보고 있음을 뜻하는 감정이었다. 지안은 자기와 같이 가족을 지키려 한 동훈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낀 한편, 이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베푸는 동정은 위로에 실패하고, 그저 스스로의 무기력을 인정하는 슬픔이 외려 타인을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은.



3. 구원은 가능한가 : 갈망



“귓가에 울리는 그대의 뜨거운 목소리
그게 나의 구원이었어“

-이적, 하늘을 달리다
 

이 노래가사 속 ‘구원’은 곧 사랑이다. 흔히 ‘구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해석되지만 꼭 종교가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구원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과 지안의 모순된 권력관계는 쌍방의 구원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상황이나 동훈이 지안을 도와줘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동훈의 목숨을 쥐고 있는 지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일부 시청자들은 지안이가 ‘키다리 아가씨’가 될 것 같다고 예측하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동훈이 지안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여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지안에게도 어떤 의미의 ‘구원’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6화가 방영된 시점에서 보면 동훈은 지안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고, 자기도 모르게 지안을 구제해주고 있다. 5화에서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사는 지안이 할머니를 돌보는 모습을 보고 동훈은 “착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6화에서 사채업자에게 한바탕 당한 지안이 “착하다”고 말한 동훈의 음성을 반복 재생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비록 세 글자, 한 마디일 뿐이지만 지안에겐 그만큼 절실하게 힘이 되는 음성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동훈과 지안이 이 물음에 답하는 주체라면,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나는 일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통상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구원’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 슬픔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슬픔으로 만난 인간들은 구원의 의미를 상기하기에 충분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 관련 기사에 “이 드라마는 너무 우울하다”는 베스트 댓글이 있었다. 시청자가 못 참을 정도의 우울을 느낀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에서 전시하는 인간의 슬픔이 비단 판타지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토록 실질적인 슬픔은 완전하진 않더라도 일부 가능한 구원을 이룰 것이다.



‘나의 아저씨’ 혹은 ‘나와 아저씨’


인간과 인간이 만나 이해와 사랑에 이르는 사건은 아름답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렇다. 그리고 이 ‘몇 가지 예외’에 대한 우려 때문에 <나의 아저씨>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비슷한 예로 드라마 <도깨비>를 들 수 있지만, <도깨비>는 다행히 남자 주인공을 시공간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로 상승시켜 해석의 폭을 넓혔다. 그렇다면 <나의 아저씨>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방식의 사랑’을 제안할 것인가?

이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나에게 <나와 아저씨>로 읽힌다. 지안과 동훈의 성별을 지우고, 나이를 지우고,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 등의 조건을 지웠을 때 지안과 동훈은 두 명의 똑같은 인간으로 마주설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렇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다. 5화에서 동훈의 거친 숨이 도청하는 이어폰 너머로 울려 지안의 숨소리와 오버랩되는 장면이 거듭 보였다. 슬퍼하는 인간, 고통 받는 인간, 그래서 똑같은 인간의 만남과 이를 통한 교류는 이 드라마의 주제가 되어가고 있다. 어떤 시청자는 <나의 아가씨>로 읽고 싶다는 의견을 냈는데, 이 또한 필자와 비슷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아직 결말을 예측할 순 없지만 이 드라마가 계속해서 현재의 기조를 잃지 않고 농도 짙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주기를, 애청자로서 기대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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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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