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18년, 여전히 신여성은 도착 중: MMCA "신여성 도착하다"展 늦은 리뷰 [문화공간]

글 입력 2018.03.2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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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김연실)가 동경으로 뛰어오고 지금 학교에까지 들어간 것은, 본시는 무슨 중대한 목적이 있는 바가 아니라 집에 있기가 싫어서 뛰쳐나온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회장의 연설을 듣고 보니, 자기의 등에도 무슨 커다란 짐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조선의 여자가 어떻게 구속되고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전에 진명학교 창립 선생님도 그런 말을 하였고 지금도 또 여기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것이 사실일지 언대 그것을 구해낼 사람은 남자가 아니요 여자이어야 할 것이고, 여자 중에서도 먼저 선진국에 와서 새 학문을 배운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문학이란 연애와 불가분의 것이었다. 연애를 재미나고 자릿자릿하게 적은 것이 소설이고 연애를 찬송하여 짧게 쓴 글이 시라 하였다. 연애라는 도정을 밟지 않고 결혼하여 일생을 보내는 조선 여성을 해방(?)하여 연애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선각자에게 짊어지운 커다란 사명의 하나이라 보았다.

-김동인, <김연실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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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석주, 여성선전시대가오면, 조선일보, 1930


 일찍이, 신여성과 구여성이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함과 동시에 일본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의 문화와 사상이 있었고 이를 누구보다 빠르게 접하고 흡수한 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 사회생활, 직업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었고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해야 한다 믿었으며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말하는 남녀상열지사와 부부유별과 같은 고리타분한 남녀의 구분에 반발했다. 당대 남성들은 양장을 입고 최신 유행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뾰족구두를 신고 양산을 든 이들에게 동경과 경멸이라는 양가적인 시선을 던진다.

 위에 인용한 "김연실전"은 김동리가 당대의 신여성인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로 신여성에 대해 동시대의 남성 지식인이 가졌던 경멸적인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김연실은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악에 받치고 후안무치한 인물로 아무 생각 없이 동경으로 넘어가 본인은 조선의 선각자로서 조선 여성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갖게 되지만, 실제로는 배운 것 하나 없이 문란하게 자유연애를 추구하다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소설에서 김연실로 대표되는 신여성은 자유연애만 깨우쳐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서구식 생활을 추구하는 자들로 형상화되며 이들의 성적 욕망은 타락하고 부정적인 것으로만 그려진다. 이 인물의 모델이 된 김명순은 김연실과 같이 기생의 딸로 동경 유학을 다녀온 1세대 여성 작가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여성이 남성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타자화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했지만, 김동인이 김연실전을 통해 실제로는 성폭행 피해자인 김명순에게 '헤픈 여자'라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당시 지식인계에서 매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염상섭, 전영택 등 당대 남성 문인들도 여성 작가들을 탕녀로 몰며 그들의 작품세계를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 남성에게 있어 신여성은 동시에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지적이며 범접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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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저것이 무엇인고, 1920
 

 나혜석의 1920년 작 <저것이 무엇인고>에는 이처럼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조선 남성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나타나 있다. 양장을 하고 바이올린을 들고 가는 신여성을 보며 갓을 쓴 두 남성은 '저것이 무엇인고, 아따 고 기집애 누가 데려가려나, 건방지다'며 혀를 끌끌 차지만, 이내 '고것 참 이쁘다'며 인사라도 건네보고 싶어 기웃거리며 선망의 시선을 던진다.

 1920년~30년대 전후에 신여성과 구여성이 있었다면, 2000년대에는 김치녀와 개념녀가 있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실린 안석주의 '여성선전시대가오면'에서 꼬집고 있는 신여성의 허영심은 2000년대 온라인상에서 김치녀로 프레이밍 되었던 사치스럽고 의존적인 여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경질적이고 독신이며 월세도 감당하지 못하고, 남성에게 초콜릿, 피아노 등을 사 달라고 요구하며 돈 많은 남자의 구원을 바란다는 프레이밍은, 무례하고 도도한 척 하지만 사실은 비싼 커피를 마시고 명품을 사기 위해 식사를 포기해야 할 만큼 무능력(?)하며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인생역전을 바라는 여자들이라는 21세기의 프레이밍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동시에 김치녀는 남성이 쟁취할 수 있는 성공의 지표이며 김치녀에 대한 경멸은 그 성공을 이루지 못한 남성들이 표출하는 굴절된 분노라는 점에서 신여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다시 한번 만난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한 남성'이란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올라 부를 획득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해 명품이든 집이든 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가장'아닌가. 그러나 한쪽 젠더에만 치우친 부양과 성공의 의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부담이고, 이상적인 남성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은 여성에게 명품을 사 주는 남성이 아닌 그것을 받아 드는 여성에게 굴절되어 나타나게 된다. 사실상 한 개인이 자신의 자산 내에서 가방을 사고 밥을 굶거나 애인에게 비싼 선물을 사 달라고 조르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썩 좋아 보이진 않을 수 있으나 온 사회가 집단적으로 반발심을 가지고 비난해야 할 정도의 악행은 아닐 것인데, 온갖 미디어에서 유행처럼 김치녀 프레임을 재생산하며 김치녀로 판별된 여성을 사회에서 거의 매장하다시피 하는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여성이든 김치녀든 새로운 사상과 주체적인 욕망을 가진 여성은 기득권 계층에게 일종의 위협으로 다가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신여성이란 결국 대상으로서 정의되는 텅 빈 기표이다. 여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은 여성을 신여성이라 하는가? 양장을 한 여성? 일본 유학생? 자유연애 추구자? 비혼 주의자? 전시 팸플릿에 따르면 '신여성(New Woman)'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 일본과 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국가마다 개념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 정치적, 제도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근대기 새로운 여성상을 의미한다. 조선에서는 1890년대 이후 근대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은 여성이 출현했으며 몇몇 여성들을 시작으로 한국의 여성들은 조금씩 '서구화'되었는데, 그럼 어느 시점부터 이 일부 신여성들을 그저 일반적인 한국 여성으로 지칭할 수 있는가? 2018년의 여성들은 왜 신여성으로 지칭되지 않는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상을 신여성이라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 기의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니 사실상 '신여성', 그보다 조금 이후의 '양공주'는 그 실체조차 모호한 기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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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여성 도착하다展 포스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지난 2017년 12월부터 진행되어 4월 1일 막을 내리는 신여성 도착하다展 은 일제강점기 '신여성'이라는 새롭고도 복잡한 '현상'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일종의 아카이브 전시다. 1부 신여성 언파라-드(on parade)에서는 미술뿐 아니라 영화, 광고,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여성의 신체가 이미지로 소비되는 양상을 포착한다. 1920년대 잡지와 신문의 출판이 활발해지고 영화, 박람회 등 시각적 대중문화가 형성되면서 열녀전, 풍속화, 미인도 정도로 제한되던 조선시대의 여성 재현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호로서의 여성 재현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한편 조선미술전람회나 각종 사진공모전 등을 통해 여성은 이상적 '미인', '향토적 정서', '조선 전통', '근대적 취미', '현모양처'등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수없이 만들어진다. <신여성>, <별건곤> 등의 대중잡지들의 표지화, 만화, 컷 등을 통해 재현된 여성 이미지들은 실제로서의 여성이기보다는 굴절된 식민 공간 속에서 따라가야 할 서구 문명에 대한 선망과 좌절, 욕망을 투영하는 담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여성이 하나의 기호로, 그중에서도 민족과 국토를 상징하는 기호로 소비되는 예시는 영화, 사진, 프로파간다, 회화 등 수많은 매체에서 찾을 수 있다. 1940년대 제작된 안석영의 <지원병>과 같은 군국주의 어용 영화에서는 한복을 입은 전통적인 여성인 아내와 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그들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입대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조선 땅과 비옥한 토지를 여성으로 상징화해 '어머니 대지'를 자식들(인간들)을 품어 먹이고 살아가게 하는 모성으로 치환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진정한 봄, 즉 광복이 도래한 국가에 대한 염원을 드러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역시 평화로운 봄을 맞이해 기름진 땅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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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나항공과 서울시의 서울 관광 광고(2017)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다. 작년 겨울, 아시아나항공과 서울시가 함께 만든 서울 관광 유도 광고를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걸려다 비판 여론에 부딪혀 철회한 사건이 있었다. 한복을 입은 채 우아하게 옷고름을 잡고 있는 여성의 반투명한 모습이 전면에 드러나고 이를 통해 광화문의 풍경이 배경으로 엿보인다. 인상적이고 기괴한 광고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보여주기 위해 여성의 몸이라는 기호를 끌고 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서울의 연인이랍시고 벗은 여자 사진이 가득한 삐라를 뿌린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의견이 있었다. 백번 동의하는 바이다. 결국 서울시와 아시아나항공이 홍보하고자 했던 서울이라는 도시, 한국이라는 나라는 단아하고 조신하고 아름다운 전통 여인으로 치환되는 기호이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는 신여성들에게 기득권 남성들이 느끼는 위협은 단순히 자본과 지위에 대한 경쟁자의 증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숭고한 땅이자 지켜야 할 이 땅의 딸들이라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던 여성들이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상에 눈 떠 고유한 욕망을 가지고 주체로서 부각될 때, 그들이 지켜오던 순수한 민족성과 국가는 서구의 문물과 사상에 의해 침범당하고 훼손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더 이상 민족과 국가의 기호가 아니게 되어 버린 조선 여성은 배제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

 <신여성 도착하다> 전은 이러한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전시였다. 1부에서는 '신여성' 현상의 이면에 놓은 여성 계몽과 해방 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한편, 엄격한 가부장제 하에서 자유연애와 결혼 등을 거치며 신여성이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살펴보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신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대한 사진, 인쇄물, 영화 등의 자료들을 힘 있는 하나의 주제로 엮어 끌고 나가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몇십 부의 여성잡지 표지를 나열하여 번갈아 나타나는 전통적인 여인상과 서구화된 여인상을 제시하는데, 급격한 서구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떠올릴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내기에는 힘이 부족한 듯했다.

 2부에서는 부덕을 기르고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던 근대기 여성교육 하에서 미술가로 활동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준다. 전시에서는 근대의 여성들에게 화가가 된다거나 도화 교사가 되는 것은 잊혔던 자기를 찾는 행위이며, 자기의 능력을 자각하는 행위이자, 여성에게 허용 가능한 사회적 활동이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2부 전시장에 들어서 정찬영, 이현옥, 배정례, 박례현, 천경자, 나혜석, 이갑경, 나상윤 등 대표적인 여성 화가들의 작품을 차례로 감상하고 나면 전시 도입에서 제시된 문제의식은 희미해지고 만다. 물론 근대에 많은 여성 화가들이 다방면에서 남긴 걸작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전체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가 근대 한국에서 형성된 '신여성'현상의 실체에 대한 고발과 그들의 존재가 현대 한국에서 보여주는 의의라면, 전시는 조금 더 강경하게 초반에 잡은 문제의식을 발전시켜나갔어야 한다.


 

 그러나 <신여성 도착하다>는 신여성의 문제를 단지 일제강점기 몇십 년 간 나타났던 특수한 현상이 아닌, 현대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담론으로 끌고 오기 위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현모양처론과 대립한 여성해방과 자유연애의 충돌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환기하며 여성교육과 계몽이 문화계에서 어떤 작품을 낳는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3부까지 이어지는 전시를 관람하고 나오면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2018 모던걸 다이어리 부스를 찾을 수 있다. 관람객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들어야 했던 말들을 상황과 함께 적어 내면 직원들이 인적사항을 가린 채 홀에 전시해 전시해주고 있었다. 거래처와의 중요한 거래가 불발되자 상사가 "여자 직원과 함께 미팅에 나가 부정 탔다"며 투덜거렸다는 32세 여성의 사연을 읽고 씁쓸한 마음으로 건물을 나섰다.

 1900년대 조선에는 신여성이 도착했다. 뒤이어 1950년대부터 양공주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그들도 도착했으며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김치녀, 된장녀도 도착했다. 지금, 2018년에는 어떤 여성들이 경멸의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는가? 어쩌면 신여성은, 한 세기나 넘게 다른 겉모습과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해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들이 타인에 의해 불리는 이름을 가지는 한, 남성과 차이 없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그냥 그렇게 존재하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도착은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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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태, 인물일대 중 <탐구>, 1944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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