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2.0] 반 고흐의 작품 속에서 반 고흐를 만나다

글 입력 2017.12.1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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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었다. <보암보암>의 주제로 미리 점찍어 둔 소재로 오피니언이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컨텐츠를 바꿀까말까. 이미 놓쳐버린 기회인지, 개성을 살려볼 수 있는 기회인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은 ‘러빙 빈센트’ 이 다섯 글자를 노트북 화면에 하나하나 찍어 눌러보았다.

 초등학교 때 동네 서점을 가는 걸 좋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책이 가득한 공간에 앉아 있으면 안도감과 편안함 느끼곤 했다. 빼곡히 들어 차 있는 책등을 더듬으며 재미있는 책 제목을 찾아내기도 하고 세로로 적혀 있는 서로 다른 책의 제목을 가로로 한 자 씩 읽으면서 숨바꼭질 하듯이 새로운 단어나 문장을 만드는 게 재밌었다. 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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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세 권이 책이 꽂혀있으면 가로로 ‘개’ ‘구’ ‘리’를 모아다가 개구리로 만들어 놓고는 친구와 깔깔 거리곤 했던 것이다. 정작 책은 잘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 날도 심심했는지 여느 때와 같이 서점을 들렸다. 책등을 훑어보다가 ‘반’ 이라는 글자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반씨 라고?’ 나의 성은 '반'이다. 겨우 성 하나 때문에 특이해져버린 이름에 내심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주변에서 아빠랑 동생 말고는 반씨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한 몫 했다. 그런데 이 난잡한 책장 속에서 반씨를 찾은 것이다! 같은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얼마나 유명하기에 책으로 쓰이기까지 하나 싶은 궁금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책의 제목은 <빈센트 반 고흐>.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빈센트 반 고흐를 아무리 난생 처음 봤어도 그렇지 어떻게 ‘반고흐’가 ‘반채은’ 같은 이름인 줄 알 수가 있나.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경험 덕분에 나는 반 고흐를 내 인생 처음 만난 화가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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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반 고흐의 방 

 
 동생 테오와의 돈독한 우애, 잘려나간 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은 수많은 작품들. ‘옛날 어느 마을에 살던 아무개’로 시작해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이 나는 부류의 이야기들만 한창 접했던 어린 시절의 내게 책에서 본 반 고흐의 삶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 없는 비극이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자기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자화상은 약간의 공포감까지 불러 일으켰다. (어린이를 위한) 빈센트 반 고흐 자서전을 집어들 때까지는 유쾌한 기분이었으나, 책장을 덮을 땐 우울감에 절은 채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인 <별이 빛나는 밤>에 등장하는 소용돌이 무늬는 고흐의 정신질환이 그림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위의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을 바라볼 때 혼란과 고통 속에 몸부림 쳤던 반 고흐가 더욱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딘가로 빨려들어가거나 곧 뭉개져 버릴 것만 같은 삐뚤어진 구도, 지저분하진 않지만 난잡한 가구의 배치, 색이 벗겨진 벽과 바닥. 그의 방이 실제 그러했든, 아니면 그의 눈에 그렇게 보였든지 간에 고흐의 작품은 자신의 불안정한 심리상태, 그 자체였다. 어린시절의 나는 그로부터 일종의 스산함과 공포심을 느꼈으며, 이를 반전시킬 어떠한 계기도 없었기 때문에 반 고흐를 자화상 속의 모습, 그 한 가지로만 기억해왔던 것이다.

 그러니 영화 <러빙 빈센트>의 개봉 소식을 듣고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혼돈으로 뒤덮인 고흐의 작품 속에, 고흐의 방식대로, 고흐를 환생시킨다는데 말이다.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인 <러빙 빈센트>는 로 반 고흐의 마스터피스 130여 점을 바탕으로 하여 100명이 넘는 화가들이 1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그려낸 유화로 제작되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 <러빙 빈센트>는 하나의 도전이자 예술작품인 것이다. 작품 속 공간과 배경에 그 작품의 화가가 등장하는 상상은 <러빙 빈센트>의 감독 도로타 코비엘라와 휴 웰치맨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네가 그의 작품 속 지베르니 정원의 일본식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에곤 쉴레가 그린 어머니의 고향인 체코의 체스키 크롬로프 속에서 구석구석을 누비는 그의 모습을 누군가 한 번 쯤은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화가의 작품을, 화가의 방식대로 살려내어 화가조차도 그 속에서 되살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러닝타임이 100분이나 되는 영화로 더더욱.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주인공이 '반 고흐'이기에 더욱 감격스럽다. 화가로서의 인생 전반에 걸쳐 화폭에 담아낸 어지러운 밤하늘 속에서, 자신의 거친 눈에 비친 일그러진 사람들과 함께 반 고흐가 다시 그 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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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아르망이라는 한 남자가 우체부인 아버지(룰랭)의 부탁으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아르망은 고흐가 묵었던 라부 여관에서 잠을 자고, 고흐가 만났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의 죽음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추적해 들어간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반 고흐가 어린시절의 기억처럼 마냥 비참하고,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작품이, 고흐라는 사람이 인간적으로 따듯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삶을 살다보면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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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배달부 조셉 룰랭의 초상
 

 영화 초반에 아르망은 술에 떡이 된 채 아버지에게 왜 자신이 미친 사람의 편지를, 나약해 빠져서는 자살을 선택한 사람의 편지를 전해주어야 하느냐고 따지듯이 말한다. 하지만 룰랭은 답한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삶을 살다 보면 무너질 수도 있다'고.실제 룰랭 부부는 반 고흐를 진심으로 가족처럼 대해주었다고 한다. 반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도 "룰랭은 노병이 젊은 병사에게 하듯, 진중한 마음과 다정함으로 나를 대해주었어"라고 말하는 데서 둘 사이의 관계가 꽤나 가까웠다는 걸 알 수 있다. 룰랭은 고흐에게 따스한 사람이었고, 고흐는 룰랭에게 강하지만 무너져버린 안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불쌍한 빈센트, 그는 너무 많이 느꼈어. 그리고 그것이 그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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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영감의 초상
 

 파리 몽마르뜨의 화방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화가들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 역할을 했다는 탕기 영감은 탕기 아저씨로 불릴만큼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 속에서 아르망이 그를 만나러 갔을 때, 탕기 영감은 반 고흐가 자살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며 그의 눈빛에 어린 열정을 보고 성공한 예술가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반 고흐를 '너무 많이 느꼈던 사람'이라 평한다. 어쩌면 혼돈으로 가득찬 그의 내면은 고흐를 작은 새소리에도, 잠시 흔들리는 바람에도 곤두서게 만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느낀 모든 것을 좁은 캔버스에 담아내려다 선과 모양, 색채가 뒤죽박죽으로 엉켜들어갔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고흐를 룰랭은 진작에 알아보았다. 지나친 감수성 덕분에 고흐가 훌륭한 예술가가 되리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점심을 뺏어먹는 까마귀를 보며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외롭다는 것을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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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빙 빈센트> 中, 뱃사공


 작은 것에도 마음을 뺏기곤 하는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점심을 쪼아먹는 까마귀를 보며 웃음을 지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외로움의 표시일 수도 있다.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고 말 없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연인이 없으며, 자신을 인정해주는 세상이 없을 때, 사람은 원래 늘 존재했으나 잊고 있었던 존재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천장의 무늬,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구름의 모양, 빛이 바랜 간판 따위가 관찰하기 좋은 대상이 된다. 단순히 까마귀를 쳐다본다고 해서 외로워 보이진 않지만, 까마귀를 쳐다보는 고흐의 눈빛과 표정에서 고흐가 사랑했던 마을, 오베르의 뱃사공은 모종의 쓸쓸함을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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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구나.

너의 사랑하는 빈센트가
Loving Vincent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의 일부를 전하는 것을 끝으로, 영화 <러빙 빈센트>는 막을 내린다.  몇 글자 되지 않는 그의 고백에는 예술을 향한, 그리고 사람을 향한 고흐의 진심이 담뿍 묻어난다.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당대엔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는 자신의 그림으로 인간을 위로하고자 했고 그런 마음이 상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생애를 통틀어 고흐의 작품은 단 한 점만이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질병과 핍박을 견뎌내면서 넘치는 생명력으로 그의 작품에 깊게 뿌리내린 따스함은 이 시대에 와서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기쁨과 감동을 흩뿌린다. 천재 예술가도, 정신병으로 자살한 비운의 화가도 아닌 사람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했던 반 고흐를 반 고흐의 작품 속에 담아내는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영화는 말한다. 결국 무너져내린 그를, 너무 많이 느꼈던 그를, 늘 외로웠던 그를 이젠 우리가 마음껏 사랑해줄 차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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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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