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그 길은 돌아가는 길이 아닌 함께하는 길이었기에.

2017.08.30 4.
글 입력 2017.08.30 23:5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6 하교길


하굣길의 묘미는
문방구를 들리는 것도,
분식집에 들리는 것도,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 묘미는
집 방향이 애매하게 다른 듯,
애매하게 같은 듯한 친구와
함께 했던 하루를 다시 한 번 나누는 데에 있다.

1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30분은 넘게 천천히 걸어가고
우리만의 수다 장소를 정해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그것도 아쉬워
돌아가며 서로의 집에 데려다 줬는데,

하교 시간이 비록 오래 걸려도
그 길은 돌아가는 길이 아닌
함께하는 길이었기에

말하지 않아도
참 좋아했다.






#17 우유


나의 두 번째 초등학교는
2교시가 끝난 후 쉬는 시간에
우유를 먹게 했다.

뼈에 좋다는 칼슘이 든 우유를
초등학생들에게 먹게 하는 건
이론상 아주 적절한 일이었겠지만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에게는
매우 적절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초코 우유도, 딸기 우유도, 바나나 우유도 아닌
무조건 흰 우유만 나왔고,
흰 우유 중에서 비린내로 악명이 높은 우유였다.


가장 큰 문제는 강제였다는 점이다.

급식을 시작하고 초반에는
코를 막고 마시거나
초코 가루를 가져와 타먹는 등의 대처를 했지만

하교 길에 우유가 바닥에 던져져 터진 것을 본 아이들은
적극적인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우유는 창 밖으로 던져졌고,
화장실에 버렸졌다.

보다 못한 엄한 선생님께서
하루는 아침 조회시간에
앞으로 우유를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성문을 쓰게 하고 매를 맞을 거라며 무섭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날 하교길에
누군가가 그 선생님의 차에 우유를 던졌다.

그날 부로 우유 급식은 선택이 되었다.
그날 부로 우유가 땅에 버려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8 첫눈


추운 날, 큰 이모네에 있을 때였다.

그날은 주말이라 가족 모두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잤다.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이는 천장.
방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새벽도, 아침도 아닌 것 같은 애매한 빛.

언니를 깨우기 싫어
살금살금 방 밖으로 나가니

아마도 아침을 가장 먼저 만났을 이모가
부엌에서 작은 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여기를 보라며 뻗은 손.

이모가 가리키신 곳은
부엌 옆 작은 베란다의 창.
정확히는 그 해의 첫눈이었다.

하얀 세상은 눈이 부셨다.
창 밖의 모습은 마치 가짜 같아,
이모에게 창문을 열고 싶다고 했다.

창이 열리고 만나게 된 진짜 세상.
입김이 나와도 창 앞에 앉아
첫 눈을, 첫 눈이 만들어낸 세상을
눈에 담았던 것 같다.


고요했던 집의 소리와
따뜻했던 집의 온도.

고요했던 눈의 소리와
차가웠던 눈의 온도.

그 대비되던 감각이 코끝에 남아
날이 갑자기 추워지는 순간에
다시 떠오른다.






#19 아이스크림


초등학교 저학년 때
주판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었다.

다녔던 기간은 짧으나 기억에 남는 일이 꽤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매일 수업이 끝나고 보던 작은 시험이다.


그 시험은 큰 강의실 앞에 화면을 띄워두고
그 화면에 나오는 수를 정해진 시간 안에
계산해서 써두는 방식이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바로 답이 나오고 스스로 채점을 한 뒤,
또 바로 다음 문제를 풀어야 했다.

매일 5문제를 보았고,
다 맞은 사람에게는 상으로 아이스크림을 주셨다.

참 많은 아이들이 매 번 아이스크림을 먹었지만
꼭 한두 개씩 틀리곤 했던 나는
그 학원을 그만 둘 때까지
딱 하루만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날은 여느 때와 같이
시험을 보러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는데
얼굴만 알던 친구가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연수야, 너 아이스크림 한번도 안 먹어봤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니
그 친구는 모두의 비밀이자
매일 보던 그 시험의 큰 허점을 속삭였다.

“그냥 답 나오면 그걸 적어. 다 그렇게 해서 먹어.”

그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당연하게 말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아 시험 볼 준비를 아는 친구를 보며
옳은 것과 틀린 것에 혼란이 생겼다.

친구는 시험을 보는 내내
내가 틀린 답을 쓰면
정답으로 고쳐 쓰라며 지우개까지 빌려주었다.

그렇게 그날 처음으로 5문제의 정답을 모두 써서
아이스크림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던 건지.

착한 아이 마음에 못된 뿔이 생긴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도 별로 맛있지 않았다.






#20 죄와 벌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나에게 세계문학 전집 50권이 생겼었다.

책장에 순서대로 꽂아두고는
첫 번째 권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리라 다짐한 나는
제 1권이 이미 읽었던 어린 왕자였지만
다시 읽으며 순서를 지켜나갔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일곱 번째 책을 읽은 차례였던 그 날은
할머니네에 잠시 가게 된 날이었다.

하룻밤 자고 오게 되어
제 7권인 죄와 벌을 들고 갔다.

엄마가 나를 데려다 주고,
할머니도 잠시 시장에 가신 사이
거실에 혼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죄를 저지른 청년이 겪게 되는
끔찍한 죄책감과 벌에 대해 쓰여진 그 책은
9살짜리가 읽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고 무서웠던 것 같았다.

순서대로 읽으려고 다짐한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기 싫어서
몇 번을 책장을 폈다 접었다.

결국 오후 늦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책이 너무 어렵고 무섭다고.

엄마는 웃으며 나중에 읽어도 된다고 했고,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 날 이후로 순서대로가 아닌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읽어나갔다.

그래서 50권 중 49권은 다 읽을 수 있었다.

7번 죄와 벌은 빼고 말이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전문필진 명함.jpg
 


[정연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