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여름의 몽환_흩어져

글 입력 2017.06.0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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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같은 노래는 없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기분에 따라 듣고 싶은 노래도 다르고, 같은 노래도 다르게 들린다. 봄바람이 커튼을 살짝살짝 간질일 때는 아이유의 < 복숭아 >, 나뭇잎을 쪼개고 발등에 내려앉은 햇빛이 귀여울 때는 백예린의 < Bye bye my blue >, 빗방울이 창문을 가볍게 톡톡 칠 때는 스텐딩에그의 < 뚝뚝뚝 >, 여행길을 헤매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을 때는 어반자카파의 < 목요일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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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6월 초, 여름이 고개를 내비치는 시기다. 아침저녁은 선선하고 낮에는 적당히 땀이 솟을 만큼 더운 날씨. 이런 날씨가 되면 귀는 몇몇 노래를 애타게 찾곤 한다. Keira Knightley가 부른 < Lost Stars >, 백지영과 송유빈이 < 새벽 가로수길 >, Tori Kelly의 < Dear No One > 등이 그렇다. 이런 노래들은 귀가 원하는 만큼 흔쾌히 들을 수 있게 해주곤 하지만 김이지(꽃잠프로젝트)의 < 흩어져 >에 대해서는, 짐짓 모르는 척 해버린다. 이 노래에 가슴 아픈 추억이 얽혀서도 이 노래를 미워해서도 아니다. 되려 요즘 날씨에, 요즘 기분에 지나치게 알맞은 노래라 그렇다. 마치 지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 흩어져 >가 귓속을 울리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인다. 음악감독이 여기에 깔면 딱 좋겠다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흘린 음악을 타고 한없이 꿈을 꾼다.




우린 어딜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찾을 수 없는
이 길의 끝에 서있는 걸
어디로 가는지
어디쯤인 건지
너는 아무 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심지어 종착지도 어딘지 모르는 길의 끝에서 말 없는 그 사람과 서있다. 막막한데, 좋다. 꼭 가야 할 곳도 없는데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방황할 시간도 기회도 많지 않은데 노래 속에선 언제든 가능하다.


반쯤 떠 있는 
희미해진 그 기억들도
이젠 이렇게
그림자가 되어가는 걸
어디로 가는지
어디쯤인 건지
내게 말해줘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니었나보다. 한참을 자다가 방금 막 깨어난 강아지의 눈마냥 희미하고, 초승달만큼 아련한 기억들이 있다. 이제는 그 기억들이 그림자가 되어간다. 그 사람 곁에 있어서 좋았는데 갑자기 서글퍼진다. 왜 우리의 기억은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었나. 그림자가 된 덕분에 그들은 완벽하게 우리의 한 부분이지만 동시에 잡을 수도, 만질 수도, 밟을 수도 없다. 우리의 기억이 더 이상 현실이 아닐 때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디쯤인 걸까.


여기 남겨진 우리
눈 감을 수 없는 시간들
손을 내미는 
돌아가야만 하는 그날까지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데 돌아가야 할 날이 있다니. 야속하다. 아마 그 날 우리는 헤어지나보다. 아직 헤어지진 않았으나 직관은 그렇게 말한다. 기억의 파편으로 생긴 무거운 그림자를 달고 돌아가는데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거다.


나는 하얗게 부서져
까맣게 떨어져 내려와
하얀 바람에
떠올라 떠올라 날아
까만 밤으로 흩어져 가요
너는 이렇게 남아서
여전히 머물고 있는데
닿을 수가 없는 니 모습
오늘도 이렇게


 그래서 나는 돌아가는 대신에, 하얗게 부서지기로 한다. 너는 그곳에 있지만 나는 하얗게 부서졌다가 까맣게 떨어진다. 하얀 바람에 떠올라서, 날다가, 까만 밤으로 흩어진다. 하필 왜 까맣게 떨어지기로 한 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추억 속에 살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그 어쩔 수 없음에 또 동해 버린다. 옆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그 사람이 최소한 그림자에서 만큼은, 기억 속에서만큼은 하나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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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허물어져갈 때, 마침내 해가 꺾일 때, 그렇게 무언가 저물어갈 때 <흩어져>는 잘 어울린다. 봄기운을 미처 보내지 못한 애매한 날씨와 아직 좀 더 머물고 싶은 해의 끝자락, 그것을 밀어내는 달이 만들어 낸 오묘한 하늘에 한 번 걸치기에 좋다.  하지만 서글펐다가, 야속했다가, 미웠다가, 허무해져 버리는 게 힘이 든다. 일부러 이 노래를 피한다. 그 몽환적임, 그 멜랑꼴리를 견디질 못해서 그렇다. 일부러 이 노래를 듣는다. 민들레 홑씨처럼 낱낱이 흩어지고 싶어서 그렇다. 오늘도 이렇게 싱숭생숭하다.
 



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구글 이미지 발췌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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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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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민
    • 안녕하세요. '두레'에 참여중인 이승주라고 합니다. "항상 같은 노래는 없다"라는 말이 정말 와닿는것 같습니다. 어떠한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공간,시간, 이미지, 사람 등 많은 것이 떠오르고 이러한 노래를 듣는 현재의 시공간, 분위기 등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는 이런 가사가 어떠한 순간에는 멜로디가 집중되어 들려오고 그로 인해 새로운 기억, 추억을 만들기도 이전의 것들을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 "노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채은님이 생각하시는 분위기와 이미지를 이야기 해주시면서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요새 너무 쳐져서 추억이 담겨져 있지 않은 밝은 느낌의 신곡들만 들었는데, 이전의 추억을 여행 할 수 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힘을 내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뜻밖의 "심쿵"이였습니다. 채은님이 올려주신 노래를 들으며 글을 읽으니 감수성을 마구 자극하고 있습니다. ㅎㅎ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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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달곰
    • 2017.06.30 17: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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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민안녕하세요 승주씨! 피드백 감사드립니다. 제가 써내려갔던 감성이 누군가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네요 ㅎㅎ 밝은 노래도, 이렇게 갈 길 잃은 듯한 노래도 모두 승주씨에게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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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안녕하세요 두레 참여 중인 김소원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두레에 참여하다보니 채은님의 글을 읽은 적이 그 전에도 몇 번 있었는데요 그럴 떄마다 느끼는 거지만 스쳐지나는 느낌이나 감성을 글로 참 잘 포착해내시는 듯 해요. 이번 글도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노래는 있는 법이지만 그게 나에게 왜 특별한지 남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노래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글을 다 읽고나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 <흩어져>를 들어보고 싶어졌어요. 앞으로도 '보암보암'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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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eonjg
    • 안녕하세요 쓰다듬다, 조현정입니다!
      글에서 보암보암이라는 느낌이 함뿍 묻어나요. 글에서 반채은님만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이 보암보암이라는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하게 피어나고 있네요:-)
      특정한 때에 매일 듣던 노래도 더 특별하게, 더 우울하게,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게 색다르기도 하고 어쩔 때는 신기하기도 해요. 아 이게 이런 가사를 담고 있었나?하고 새삼 깜짝 놀라기도 하죠.
      채은님의 글에서 제가 자주 듣던 노래제목이 나와서 반갑기도 하고 처음 보는 노래제목에,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 잘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보암보암이 물씬 묻어나는 글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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