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네모의 미학,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1.3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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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미장센의 영화

2014년 개봉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을 논할 때 ‘미장센’을 빼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장센(mise-en-scéne)이란 연극과 영화 등에서 연출가가 배열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일컫는 미학 용어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 중에서 특히 아름답고 독보적인 미장센을 강조한 영화이며, 그 화려한 색감, 정갈한 화면 구도, 디테일한 소품 하나에 이르기까지 관객의 시각을 만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호텔의 지배인을 둘러싼 음모와 사건사고, 벨 보이와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 등 영화의 플롯 또한 매력 있지만, 그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이 영화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데에 미장센이 돋보이는 역할을 했다는 데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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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모티프"

얼마 전에서야 이 영화를 즐겁게 관람한 뒤 작품의 미적 완성도에 감탄했던 한 사람으로서, 영화의 미술적 측면에서 하나 주목할 만한 요소를 꼽으라면 ‘네모 모티프’를 고르고 싶다. 사실 모든 영화는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논하는 것이긴 하지만(이 영화의 경우 16⨯9 직사각형), 화면을 채우는 다양한 소품들이나 촬영 구도 자체가 네모이거나 네모를 연상시키는 것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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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화려한 전경은 자로 잰 듯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이며, 그 내부의 창문, 문, 목욕탕, 액자 등등의 자잘한 소품들 또한 네모이다. 영화의 중요한 소품 중 하나인 멘들 빵집의 포장 상자 또한 정육면체이다. 또한 화면 구도를 볼 때, 소품이나 인물을 빈번히 화면의 정중앙에 배치하고, 창문 안에 인물들을 담는 이중 프레임 구도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반듯하고 밀도 있는 화면을 구성해 냈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각이 잡힌 인물들의 자세나 표정, 동작들도 직선의 네모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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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의 효과

이러한 ‘네모’가 주는 미적, 심리적 효과는 어떤 것이 있을까?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에서 보듯, 일반적으로 네모가 주는 느낌은 경직되었고,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 이 영화의 배경이 호텔이라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급이 높은 호텔일수록 완벽성을 추구한다. 먼지 털 끝 하나,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외관과, 전문성을 내비치는 직원들의 신속하고 정확한 서비스, 그런 것들이 고객을 만족시키고 고객에게 신뢰를 준다. 주인공인 호텔 지배인 구스타프 (랄프 파인즈 役) 역시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함과 우아함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네모 이미지들의 완벽함과 경직성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고, 이것이 파스텔톤이나 강렬한 원색과 결합했을 때 신비로운 동화책을 연상시키게 된다. 또 바로 이러한 비현실성, 동화 같음 때문에 이 영화의 플롯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 어렵게 되기도 한다. 현실과의 너무나 큰 괴리감, 부자연스러움, 환상적임, 연출가는 이런 것들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관객을 영화 밖으로 끄집어내고 플롯 밖에서 작품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 같다.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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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의 틈

하지만 네모가 주는 이런 완벽함과 비현실성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구스타프의 시와 향수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그만한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지배인 구스타프는 냉철하고 각 잡힌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시를 읊는 것을 좋아하며 틈날 때마다 몸에 향수를 뿌린다. 이러한 행동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고(도망쳐야 할 순간에 갑자기 시를 읊는다거나, 쫓겨 다니는 와중에 향수를 찾는다거나…), 또 그런 것들 때문에 그와 벨 보이 제로 (토니 레볼로리 役)와의 끈끈한 유대를 형성하게 되기도 한다. 네모의 직선을 파고드는 이러한 곡선적인 면모들, 완벽함 속의 허술함, 비현실적인 것들 사이에서의 인간적인 것들. 네모의 딱딱함은 부드러운 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결국은 그런 것들이 이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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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영화이다. 그리고 그들이 영화의 어떤 장면을 기억하든, 그 속에는 ‘네모 모티프’가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웨스 앤더슨 사단은 이 영화를 통해 네모를 가장 교묘하고, 치명적이고, 아름답게 활용한 것으로 영화사에 기록되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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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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