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갈고 닦자, 사랑의 기술 [문화전반]

사랑의 진짜 모습을 찾아서,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글 입력 2017.01.0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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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술인가? 
아니면 사랑은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즉 행운만 있으면 ‘빠져들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사랑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는 늘 흥미롭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낭만'이나 '운명'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사랑에 빠져들 때 덮쳐오는 두근거림과 쾌감은 차마 사랑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든다. 한창 ‘썸’이 하나의 오락처럼 소비되었던 것도 그렇다. 연애에 돌입하기 직전, 긴장감과 ‘밀당’하는 재미가 있지만 책임은 없는, 미묘한 그 관계가 유행처럼 퍼졌던 것은 사랑의 시작이 주는 즐거움을 연장하려는 사람들의 바램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읽어 온 동화들, 나이 먹고 접하게 된 문화컨텐츠들에서도 사랑의 시작은 인기있는 소재다. 반면 사랑이 ‘어떻게 지속되는가’에 대해서는 ‘오래오래 행복했다’는 몇 구절로 간추려지기 일쑤다. 그래서일까 “사랑은 기술”이라는 말에선 이질감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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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by Arturo Espinosa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은 그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로 세 가지를 든다. 
 첫 번째, 사랑문제를 사랑하는 능력('loving')이 아닌 사랑받는 일('being loved')에 대한 문제로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가, 더 사랑스러워질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두 번째, 사랑의 문제를 능력에 대한 문제('the problem of a faculty')가 아닌 대상에 대한 문제('the problem of an object')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만한 대상이나 나를 사랑해줄만한 대상을 찾는 게 어렵다고 느낀다.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이 당연해지면서 ‘자유’라는 개념은 사랑의 대상이 갖는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동시에 시장에서 상품이나 노동력이 교환되는 방식 역시 대상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교환가치 대비, 가장 멋진 상대를 발견하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하고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데에 있다. 그 순간 경험하는 행복감은 강렬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 격정적인 감정이 막을 내리면 사람들은 사랑이 '끝났다'고 여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생각들이 오류임을 증명하고, 사랑이야말로 '기술'('art')이라 말한다. 사랑은 배우지 않아도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 이론을 공부해야할 뿐 아니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실행에 옮겨 익숙해져야 한다. 멋진 집을 짓기 위해서는 건축이론을 배우고 오랜 연습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말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숙련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간은 이 '사랑 숙련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랑에 쏟는 시간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돈벌기도 바쁜데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라니?' '사랑이 밥먹여주나?'싶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 무엇이냐란 질문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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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사랑처럼 "거대한 희망에 부풀게 만들었다가"도 처참하게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이렇게 흔하면서도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은 거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에게 있어 사랑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사랑은 인간 존재자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생명체'다. 자신이 분리된 독립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짧은 생애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혹은 자신이 그들보다 먼저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안다. 또한 자신이 분리되어 있으며 혼자란 사실을, 자연과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은 무력할 뿐이란 사실을 안다. 이 모든 것은 분리되고 분열된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이 감옥에서 빠져 나와 자신을 타인 또는 외부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 결합하지 않으면 곧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인간은 이성과 함께 '고립'에 대한 인식도 함께 얻었다. 이는 불안의 근원이며 존재를 위협한다. 모든 시대와 문화 속에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립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람들은 집단의 관습, 관례, 신앙에 동조하거나 일상적 노동과 오락에 집중했다. 또는 예술처럼 창조적인 활동들에 의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방법들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나 타인과의 결합은 부분적인 해답일 뿐이다. 고립감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상호 인간적인 결합, 즉 사랑에 있다. 사랑은 고독한 한 존재를 다른 한 존재와 결합하게 하며, 이로써 우리의 고립감, 그 불안의 근원지를 해소시킨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논의들도 담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사랑'에 대한 그의 논의가 "개인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시대 (1900~1980)가 어떻게 사랑의 발전을 어떻게 방해해왔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일은 곧 "오늘날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며 "이렇게 만든 데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라 말한다. 여전히 사랑의 기술을 배우는 일이 사치로 여겨지는 시대, 사회 경제 조직이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대, 이기주의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에 직언을 가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여기있다.


[이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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