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죄

글 입력 2016.11.1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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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가득한 가방을 메고, 무릎까지 오는 교복 치마를 입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과 사먹던 핫도그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야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18살의 내게 꿈이 있었다면 지방에 있는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것이었다. 큰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기도 했고 좀 더 좋은 대학을 다니고 싶었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엄마였다. 

 고리타분한 사람. 솔직히 말해 어릴 적부터 내 머릿속 엄마의 이미지는 그랬다. 물론 엄마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걸 잘 알고는 있었지만 보수적인 엄마가 내게 허용한 행동범위는 가혹하리만큼 좁디좁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친구 집에서 한 번도 자본 적이 없다. 잠은 집에서 자야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엄마에게서 오는 전화로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리곤 했다. 달이 떴을 때 밖에 있는 건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성친구는 당연히 안 될 일이었고 단지 친구라 해도 둘이서만 만나는 건 불가했다. 나고 자란 도시를 벗어날 수 있는 건 무조건 부모님과 함께일 때뿐이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에서 합법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고 고등학생시절 내게 그보다 더 큰 동기부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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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꿈을 이룬 스무 살의 나는 두 손에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주체하지 못하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드디어 쓸모 있어진 반들반들한 주민등록증이 마패인 냥, 과에서 단체로 맞춘 과 잠바가 갑옷인 냥 세상 무서울 게 없었고 고향집에서 살았더라면 상상도 못했을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엄마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해가 지면 끝도 없이 전화를 했고 밤에 친구 집에 놀러간다고만 해도 난리가 났다. 엄마는 갑작스러운 딸의 변화에, 딸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엄마와의 관계는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두 달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모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에게 못된 말들만 내뱉기를 몇 달. 그렇게 미워도 하고 원망도 했던 그녀를 이해했던 건 우연히 마주친 어떤 한 순간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끄떡없는 어머니의 모습.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알았던 나.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심순덕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에는 이 단어가 연마다 반복해서 등장한다. 같은 단어이지만, 내겐 하루 종일 죽어라 일하고 찬 물에 빨래를 하고 굶더라도 식구들 밥을 더 먹이고 발뒤꿈치가 해지고 손톱이 닳아도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어머니’외할머니를 보고 싶어 하고 소리 없이 숨죽여 울던 ‘어머니’는 마치 다른 단어인 냥 다가왔다.

 지금의 나는 나 자체로 살아간다. 딸로서, 언니로서, 학생으로서, 손녀로서,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몇 가지 역할을 맡아 하고는 있지만 그 어떤 역할도 나 자신보다 크지 않으며 그렇게 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한 명인 테레자라는 여자가 이런 말을 한다.


“모든 생명에 어머니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면 모든 생명은 유죄다.”


 앞으로 나는 직업을 갖고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결혼을 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명찰들을 가슴에 달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마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명찰은 그 어떤 명찰보다도 커다랗고 무거운 역할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달고도 나는 나 자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직 그에 대한 답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건 우리 엄마에 대해 나는 ‘유죄’이며 사실 대부분의 엄마에게 모든 자식들은 ‘유죄’라는데 있다. 단지 어머니라는 이유로 많은 날들을 그녀 자체로서 살아가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유죄. 그보다 더 큰 희생이 또 있을까. 앞서 말했던 전자의 어머니와 후자의 어머니가 다르게 느껴졌던 건 아마 전자의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역할을, 후자의 어머니는 어머니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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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죽여 우는 어머니. 그녀의 본래 모습을 떠올리면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마치 어머니가 남성과 여성을 떠나, 모든 인간에 대한 구분과는 관련 없이 존재했던 것처럼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엄마는 엄마라는 명찰을 달기 이전에 여자이고 누군가의 딸이며 그녀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그 명찰이 그녀에게도 처음이었기에 두려웠으리라는 걸 말이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한 생명을 잘 키워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무겁고도 잔인하게 그녀를 짓눌렀을 것이다. 한 때는 우주인이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을 소녀가, 멋있는 커리어 우먼이 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며 자랑스러워했을 당당한 여성이 그녀의 두 손에 온전히 목숨을 내맡긴 한 생명체때문에 겁 많고 보수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걸 그 생명체가 알아주지 않아 허망했을 것이다. 그래도 강한 어머니여야 해서 서러웠을 것이다.


 여전히 난 엄마 말을 안 듣는 못된 딸이다. 하지만 엄마를 그녀 자체로 바라봤을 때부터, 엄마가 이제껏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모든 제재들과 별의별 잔소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토록 싫어했던 그것들에서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잃을까 두려웠기에 어쩔 수 없는 그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로서 엄마가 해냈던 수많은 희생들을 당연시하고 또 엄마를 엄마가 아닌 사람으로는 살아가지 못하게 한, 심지어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죄를 엄마가 되기 전에 조금 더 빨리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오늘도 엄마에게 전화 한 통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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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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