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마음 밑바닥을 두드리는 음산함 - 연극 ‘싸이코패스는 고양이를 죽인다’

글 입력 2016.11.03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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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한 빌라. 빌라의 관리인이 어느 날 입주민들을 모은다. 모임의 이유는 몇 달 동안 주위에서 죽어나가는 고양이 때문.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른 마리 이상 희생되었다는 것이 관리인의 설명이다. 모임에 응하지 않은 301호의 남자에 대한 불길한 제보가 하나 둘 이어지는 가운데, 옆 동네에서 벌어진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 역시 그 남자가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한다. ‘싸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여러 얘기들로 301호 남자를 ‘싸이코패스’라고 몰아가며 마침내는 자신들이 당하기 전에 먼저 그 남자를 경찰에 넘겨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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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 누구로부터? 허리가 아파서 요가학원에 다니는 숫기 없는 자동차 정비공으로부터?

 사람들의 의심은 틀렸다. 그는 그저 숫기 없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이웃과의 교류가 적은 것도, 말수가 없는 것도, 혼자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듣기 전에 어린 시절의 아동학대, 여성혐오, 동물 학대 등 인터넷에 떠도는 몇 가지 키워드를 근거로 ‘그 남자는 싸이코패스’라는 억측을 합리화 시킨다. ‘~한 것 같은데’ 식의 화법과 확인되지 않은 정보는 의구심을 일으키고, 함께하지 않은 이에 대한 일종의 공격심리는 의구심을 부풀린다. 누가 했는지도 모를 말들은 의심이 아닌 확신으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정보는 판단의 잣대로 둔갑한다. 고양이가 죽었다, 옆 동네 여대생도 죽였다, 301호 남자는 오지 않았다. 301호 남자가 죽였을 것이다.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장들은 의심을 다리삼고, 빈약한 정보를 지팡이 삼아 하나의 ‘진실’로 꾸며진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하게 된 진실은 바로 저것. “허리가 아파서 요가학원에 다니는 숫기 없는 자동차 정비공”이었다.



누가 그럴 수 있어요? 누가 타인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죠?

 연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의심의 희생양이 된 301호 남자는 이미 죽었으니 남자가 싸이코패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게 주민들의 새로운 자기 합리화의 방식이다. 싸이코패스가 아닐 수도 있지만 맞을 수도 있다며 자신들은 그저 자기 방어의 일환으로 남자를 살해했을 뿐이라고 합리화한다. 이어지는 책임 회피의 현장은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사람이니까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돌을 던지듯 아무렇게나 의심을 던지다가, 맞아 죽은 개구리가 있으면 일부러 던진게 아니라며 고개를 돌리는 게 사람의 습성 아니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 시도에서 오히려 그들의 본성을 엿보게 하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싸이코패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공감능력결여. 하지만 한 가지의 질문이 파문을 일으키며, 서로에게, 관객에게,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누가 타인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진실은 고양이가 물어갔잖아!

 사람들은 새로운 국면에 처한다. 자신들의 의심이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죽은 301호 남자를 진짜 싸이코패스로 둔갑시키게 만든다. 싸이코패스가 우리 빌라에 산다. 그는 301호 남자. 그는 고양이를 죽였다. 그리고 그를 ‘우리’가 죽였다. 잘못된 의심과 공유한 비밀 덕분에 빌라는 하나 된다. 공공의 비밀을 가진 빌라사람들은 빌라 일이 자기 일이라며 범죄를 합리화한다. 누구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말은 누구든지 싸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이어지며, 그 상황을 섬뜩하게 묘사한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억눌린 부분이 있다. 내 안의 억눌린 부분을 드러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고양이를 죽이는 것. 다른 사람에게 내 상처를 보이지 않는 가격으로 고양이 한 마리쯤은 싸게 먹힌 것이다. 서른 마리에 달하는 고양이는 과연 싸이코패스가 죽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싸이코패스는 누구인가? 누군가가 고양이를 모두 죽였다면 고양이들은 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죽었을까? 질문거리, 의심거리를 한 아름 던져준 연극은 말한다. ‘진실’은 고양이가 물고 갔다고.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7절~9절



 성경의 여러 일화들은 가톨릭 문화의 근본을 이루며 서양 문화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런 일화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당시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렇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에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물러난다. 죄 없는 사람은 없다. 허물, 상처, 그릇된 욕망 등 사람들은 누구나 어두운 일면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일반화시켜 자신의 어두운 면을 합리화하는데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합리화하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두운 면까지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자 태도라고 생각한다. 연극 역시 그렇다. 모든 사람이 싸이코패스의 일면을 갖고 있다는 메시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연극은 오히려 초반에 잘못된 의심을 확신으로 변모시키는 집단 폭력의 과정 속에서 모든 사람이 싸이코패스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야 함을 강조한다. 누가 타인의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인간의 근본을 훑음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타인과 공감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밑바닥을 두드리는 음산함, 연극 ‘싸이코패스는 고양이를 죽인다’를 통해 집단폭력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어두운 일면을 엿보고, 타인과의 소통을 통한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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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싸이코패스는 고양이를 죽인다'는 11월 20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월요일을 제외하고 공연된다. 30,000원의 티켓으로 섬뜩한 블랙코미디를 즐기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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