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홍상수의 영화 들여다보기 (2)시간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8.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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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적 특징에서 ‘표면적인 감각을 마주하는’ 것을 가장 먼저 언급한 이유는 홍상수의 영화적인 시도는 이렇듯 익숙해져왔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대면방식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감각의 표면을 마주하는 방식이 향하고 있는 것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일반적인 내러티브 영화에서 경험한 시간들은 다소 ‘명확한 시간’들이다. 현재의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시간들은 주로 플래시백의 형태로 현재의 사건이나 감정들을 논리적으로 보충 설명 하는 것에 주로 사용되며, 과거와 현재의 구분도 다소 명확하다. 하지만 홍상수는 시간만큼 불명확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에게 시간은 표층적인 행동과 감각들이 부딪히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홍상수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쌓아올려진 감각의 표층과 그 충돌이 발생하는 과정 중 한 순간을 끄집어 낸 것일 뿐이며, 미래 또한 과거와 현재의 표층들이 충돌하는 과정과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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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2010)>의 마지막 챕터인 ‘옥희의 영화’는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가 과거의 남자이자 나이 든 남자(문성근)와 현재의 남자이자 젊은 남자(이선균)와 각각 아차산을 올라갔을 때의 상황을 영화로 만든 이야기다. 이 챕터는 옥희의 무덤덤한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며,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의 차이점이 지속적으로 나열된다. ‘나이 든 남자와는 입구의 사슴모형을 보고 감탄을 했었고 젊은 남자와는 잘 보지도 않고 지나쳤습니다’ , ‘나이 든 남자와는 휴게소에서 몸을 녹이고 젊은 남자와는 밖에 앉아 잔치국수를 먹었습니다’ 등의 것들이다. 옥희가 두 남자와 각각 아차산을 올라갔을 때의 차이를 언급하는 나레이션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사소한 차이들이 반복되는 것에서 어떤 ‘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이 사소한 차이에는 수 많은 의미와 인과관계가 엮여 있겠지만, 우리가 옥희의 나레이션을 통해 마주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들의 차이와 이 행동들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표층들 뿐이다. 하지만 옥희는 산에서 내려올 때, ‘나이 든 분과는 말다툼을 해서 기분이 나빴지만 그분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며 내려왔고 젊은 남자와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가 나이 든 남자에게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다. 옥희의 감정은 사건으로 인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수많은 표층적인 행동과 감각들을 마주한 이후의, 즉 축적의 과정이며 결과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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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은 이 지점을 “감정에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자리 혹은 행로에 감동을 받는다. 표면의 리듬만 느껴지는 기억들이며, 누군가의 마음으로도 품어지지 않는, 그러나 거기 여전히 존재하는 기억, ‘옥희의 영화’는 반복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버려질 수밖에 없는, 동시에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차이들, 요컨대 어떤 마음, 존재, 풍경을 보는 영화다.” 라며 아름답게 표현한다. 우리가 ‘옥희의 영화’ 챕터에서 감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옥희가 나이 든 남자를 더 사랑했던 것을 이해하기에 그 선택이 아름답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남자는 과거에 축적된 시간인 채로 현재의 남자는 현재에 축적된 시간인 채로, 나레이션으로 말해지는 사소한 차이들이 인과관계로는 품을 수 없는, 세 인물의 시간과 그 충돌들에서 온 것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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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에게 과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과 흡사하다. 기억이란 것은 과거에 일어난 것들을 주관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과거의 경험이라도 다음날 더듬어보는 것과 몇 년이 흐른 뒤 더듬어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기억’과 ‘과거의 사실’은 다른 것이다. 아니, 애초에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기에 완벽한 사실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북촌방향(2011)>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지점은 성준(유준상)의 “소설이라는 술집에 갔다” 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술집 장면이다. 이 시퀀스는 총 3번 반복되는데, 인물들은 모두 이 술집에 처음 온 것처럼 행동한다. 3일 밤 동안 성준과 일행들이 술집에 왔다기 보다 같은 날의 기억을 다르게 회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우리가 같은 날을 각각 다음날, 1년뒤, 10년뒤에 회상해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기억이 그렇듯 회상할때마다 조금의 변화가 일어난다. 언제나 ‘성준과 영호(김상중) 일행이 함께 모여 놀다 소설이라는 술집에 들른다’ 는 같지만 또 다른 일행이 추가(김의성)되기도 하고 이전에는 차분하던 이가 갑자기 역정을 내기도(김상중, 송선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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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지점은 서사의 인과관계가 생략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 등장인물들과는 상관없는 관객인 우리의 기억이라는 점이다. 예전(김보경)과 성준이 키스하는 장면이 서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설명이 되지 않음에도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성준이 서울로 처음 올라왔을 때 찾아간 전여자친구인 경진(김보경)과 관계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우리는 예전과 경진이 김보경의 1인2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 예전과 걸어가던 성준이 “미안해요. 너무 취해서 그런 것 같아요.” 라고 하는 말은 이전날 예전에게 키스한 것을 사과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인물들에게는 이런 행위들이 인과관계 없이 표상적으로 나열되는 느낌을 가져다 주지만, 이 행위들에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관객)뿐이다. <북촌방향>이 가져다 주는 웃음도 마찬가지다. 성준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웃을 수 있는 관객들은 <하하하(2009)>를 본 관객에 한정되어 있고, 중원(김의성)이 하는 대사에서 웃을 수 있는 관객들 또한 이전작품을 본 기억이 작동한 이에 한정된다. 다시 말해 <북촌방향>은 인물들에게 속한 영화가 아닌 관객의 기억에 종속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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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의 결말부의 충격은 여기서 온다. <북촌방향>의 결말부는 서울로 올라왔던 성준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시퀀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장면은 상준이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와 같은 장면 같다는 기시감을 가져다 준다. <북촌방향>의 서사는 상준이 서울로 올라와 영호를 만나고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준이 서울로 올라오는 장면과 내려가는 장면이 동일한 장면이라면, 우리가 본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위화감을 ‘죽음’에 가까운 두려움으로까지 발전시키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성준은 길을 걷다가 다른 행인(고현정)에게 사진을 찍히게 되는데 이 시퀀스의 마지막 컷은 한껏 굳은 채로 사진을 찍히는 성준의 얼굴이다. 흑백의 질감, 성준의 표정, 외재적으로 깔리는 음산하고 오묘한 음악까지 이 장면은 ‘죽음’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처음과 끝이 같아져버린 상준의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못하는 이야기, 상준의 기억이지만 상준과는 상관없는 타인(관객)에게 종속된 기억이 되어버린다. 성준의 마지막 표정은 사라져가고 있는 자신의 시간을 자각한 자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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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의 예고편은 둘째밤(역시 편의상)에 술 취한 일행들이 눈 오는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가는 장면을 거꾸로 돌린 것으로 꾸며졌다. 이 장면은 무언가 아름답다는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 장면은 3일밤 동안 반복되는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장면이다. 달리 말하면 관객에게 종속되어 있는 이야기 중 우리에게 벗어나 홀로 생동감을 뿜어내고 있는 장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경은 술에 취해 반대편 도로로 뛰어가고, 영호는 보경을 쫒아가며, 중원은 비틀거리다 택시에 오른다. 그 와중에 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갈길을 가고 있다. 한마디로 이 장면은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장면이다. 단일한 목적도 규칙도 없는 이 장면은 각자가 자신의 시간을 지닌 채 활동하고 있다. 이 무규정적인 상황이 오히려 거꾸로 상영한다(예고편) 해도 이 장면에서 주는 질감과 감각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다. <북촌방향>의 가장 아름다운 이 장면은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억은 의문을 남기는 것이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라는 홍상수의 말처럼, 타인의 시간을 혹은 자신의 시간을 객관적인 진실로 종속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시간과 다름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83528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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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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