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섬세한 언어로 켜켜이 쌓은 감정의 폭발 연극 ‘단편소설집’

글 입력 2016.08.1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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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3일 연극 ‘단편소설집’을 보기 위해 대학로 예술극장을 찾았다.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작품이라 들었는데, 우선 무대가 굉장했다. 소극장 공연은 아무래도 경제적인 면이나 공간적인 면에서 웅장함이나 화려함보다는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강조된 무대들이 많았다. 하지만 단편소설집의 무대는 글 쓰는 원로작가의 오래된 아파트를 그대로 재현한 양 디테일이 살아있는 짜임새 있는 공간이었다. 조명 등의 사정으로 사진촬영을 못한 게 아쉬웠다.
 

단편소설집 (2016.07.30).jpg
 

 스승인 ‘루스 스타이너’의 등장으로 연극이 시작되었다. 유명 단편소설 작가이자 많은 작가들을 가르친 ‘루스’의 아파트로 그를 동경하는 ‘리사 모리슨’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다. 광적으로 ‘루스’를 좋아하는 ‘리사’에게 그는 일종의 종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좀 더 ‘루스’의 가까이에 있고 싶었던 ‘리사’는 그녀의 조교를 자청한다. 세월이 흐르며 둘은 굉장히 가까워지고, 어느 새 등단하여 자기만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리사’를 ‘루스’ 역시 동료작가로 인정한다. 하지만 ‘루스’와 유명 시인 ‘델모어 슈워츠’의 사적인 관계를 담은 장편 소설을 리사는 자신의 첫 장편으로 출간한다. 자신의 인생을 훔쳤다며 ‘루스’는 ‘리사’에게 분노하지만, 스승의 가르침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쓴 ‘리사’는 ‘루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술가의 도덕적 딜레마를 통해 그려낸 작가 사제의 이야기 ‘단편 소설집’이다.
 
 극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해명되었어야 했다. 사제관계인 두 여성이 가까워지는 모습, 스승의 사적인 과거의 경험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의미를 갖는 제자의 존재, 제자가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어하는 이유, 그 이유를 거부할 수 없도록 가르친 게 과연 스승이 맞는지. 하지만 도널드 마굴리스는 섬세한 언어로 켜켜이 감정을 쌓으며 그 모든 것을 해명하는 데 성공했다.
 

단편_전국향배우본.jpg
 

“넌 내 인생을 훔쳤어”
 

 스승의 말이다. 자신의 첫사랑의 경험을 장편소설로 풀어낸 믿었던 제자를 향한 절규.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의지할 만한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제자 육성은 자신에게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었고, 젊고 야망 있는 작가들을 통해 자신 역시 성장하는 과정이었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그녀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몇 안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자신을 사랑한다며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을 빛내던 소녀를 6년 동안 가르치며, 그녀에게 ‘리사’는 누구보다 큰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리사’에게 보여준 자신의 신작에 대해 제자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는 얘기한다. 나는 항상 너희에게 가르치는데, 베푸는데, 이제 동료작가인 너에게 그 정도도 바라면 안되는 것이냐고, 나도 그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어느 새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엿한 동료작가로 성장한 ‘리사’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외롭게 늙은 원로 작가가 ‘루스’였다.
 

단편_포스터_김소진배우본.jpg
 


“선생님은 제 출발점이었어요”
 

 비극적 가족사를 안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무얼 해야하는 지 알지 못한 채 살다가 소녀는 한 소설을 만난다. 그리고 깨닫는다. 글을 써야한다고. 자신에게 길을 알려준 작가를 만난 소녀는 그 흥분과 기대를 감추지 못한다. 자신의 우상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실재하는 우상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언제나 시험을 받는 기분으로 긴장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지쳤지만 조금씩 스승이 곁을 내주어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었다. 스승은 무슨 이야기를 쓸 지, 말이 아니라 일단 글로 쓰라 했다. 말을 하면 써야한다는 중압감이 없어진다고. 예술가와 작품에 담긴 가치관을 연결하지 말라 했다. 예술가 역시 사람이지 않느냐고. 스승의 아름다운 첫사랑의 기억을 자신의 글로 재현해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스승의 분노를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르침 받은 대로 썼다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훔쳤다는 우상의 분노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제자는 발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예술의 도덕적 딜레마를 같은 작가라는 직업을 지닌 사제의 얘기로 풀어낸 구도가 새로웠다. 사제 관계에 있는 두 여성의 감정적 교류가 대사와 연기를 통해 확실하게 표현되었고, 확실하게 쌓인 감정이 폭발하는 갈등의 부분은 섣부르게 누구를 편들기 어려울 정도로 둘 모두가 이해되었다. 섬세한 언어로 그려낸 감정의 폭발이 인상적인 ‘단편소설집’은 8월 21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김마루.jpg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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