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배움의 진실, "불편" : 희랍적 사고에 관한 설명을 중심으로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3.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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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이미지 출처:구글)


  예술 작품들을 대할 때, 저자의 개인적 삶과 시대적 배경을 빼놓고는 완전히 작품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듯이 고전을 읽고 사상을 배울 때도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어떤 철학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아무리 그 사상의 핵심문장을 기억하고 있다 해도, 앞 뒤 맥락 없이 단지 보기에 좋은, 그럴 듯한 ‘감성글귀’ 하나 아는 정도로 의미는 그칠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도 아닌 고대 희랍 철학과 현대인 사이, 그 막대한 시간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낯섦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희랍인의 사고방식, 즉 희랍적 사고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그 첫 번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양사와 문화, 정치학 등이 희랍 문화에 많은 빚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희랍인들이 낯설다. 그들 생각이 현대의 기준에 있어서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희랍인들은 아무런 개연성도 없어 보이는 사물과 사물을 연관 짓는다. 한 사람의 잘린 머리카락 혹은 손톱처럼 신체의 일부였던 것, 누군가가 자주 사용해서 그의 기운이 가득한 사물들은 긴밀한 연관성을 갖기에, 적이나 원한관계인 자를 저주하기 위해 옷을 태우고 찌르는 행위가 그들에겐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름은 단지 ‘호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눈, 코, 입, 손발처럼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일부다.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틸로스>에서는 언어의 기원을 다루는데 책 속에서 이름이 그 사물의 자연적인 한 부분으로서 붙여진 것인지 인간에 의해서 임의로 부여된 것인지에 관한 문제로 끝없는 토의가 이어진다. 이러한 사고 과정이 우리가 느끼기에 지나치게 원시적이고 이질적이라 하여도 우리의 지적 수준이 더 우수하다거나 그들의 발전 수준이 현저하게 낮은 단계라고 매도할 수 없다. 단지 희랍인과 현대인은 처음부터 결론을 위한 전제 자체가 다른 것일 뿐이다. 따라서 현대어로 번역된 고대 철학자들의 용어에 대해 맥락적 이해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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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미지 출처: 구글) 


  대표적인 단어들로 예를 들자면 justice(정의)라던가 virtue(덕)처럼 한 단어로 표현되는 영어가 있다. justice(정의)의 원래 희랍어는 dikē다. dikē가 희랍 문헌상에서 암시하는 보통의 뜻은 ‘정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으레 예상할 수 있는 옳고 의로운 것에 대한 애매한 이미지가 아니다. ‘관습’, ‘오랜 방식’처럼 그저 당연한 일로 여기며 처신하는 방식, 그렇게 생각되는 것 그래서 정상적이라 할 만한 것을 의미한다. 즉, justice한 상태, 정의를 따르는 것은 묵묵히 하던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서 정의는 고대 계급 체계와 연관선상에 있기에, 그에게서 올바른 것이란 자기 신분을 잘 알고 그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다. 
 

  다음은 virtue(덕). 이것의 본래 희랍어 표현은 aretē다. 그 뜻은 훌륭함, 어떤 것에 있어 탁월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aretē는 단독으로는 사용되는 경우가 적다. 정치의 aretē, 용사의 aretē라는 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가 도덕적인 것으로 쓰일 때도 있겠지만 보통은 실제적이고 유능한 능력을 말했다. 특출한 속성과 공동체 안에서 중요하게 느껴지는 자질인 것이다. 따라서 덕을 갖는다는 것은 일과 직분에 대한 지식이 기본 전제이고 유능해지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표면적인 현대어 번역만 보는 것으로는 희랍인들의 본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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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 출처: 구글)
 

  무수한 인문/철학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인문학 강연들이 주목 받고 있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해석과 재해석을 거쳐 내게 도달하는 정보들은 사실 고전을 직접 읽는 실제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그 가치가 다를 것이다. 간편하고 즉각적인 이해가 될수록 즐겁고 만족감이 크겠지만 낯섦을 직접 겪으며 자신만의 질문을 갖고 철학을 좇는 것은 스스로의 사고력을 증진시키고 삶을 성찰하는 데에 훨씬 더 의미가 큰 지침이 되어준다. 누가 봐도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어렵다. 단적인 예로 희랍적 사고를 들었지만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 앞에 난제는 무수히 많다. 


  모든 배움의 시작은 이해하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읽기와 사고의 과정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진 않겠지만 쉽게 얻은 공허한 메시지보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훨씬 더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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