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맘모스 해동 - 깨닫기 전까지 너무도 달콤했던, 텅 빈 꿈

“브라보, 브라보.”
글 입력 2016.02.17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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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모스 해동. 계속 속으로 뇌까려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였다. 맘모스와 해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마치 전자렌지 안으로 맘모스를 집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닌가. 맘모스가 녹아간다. 머나먼 과거와 지금 이 현재가 충돌하는 그 긴장감. 긴 세월, 우리가 모르는 과거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상상을 갖게 만들었던 맘모스란 존재가 현실 속으로 침범해 들어온다니. 얼음 밖으로 나온 맘모스는 과연 축적된 긴 시간을 견딜 수나 있을까. 확실히 상상은 상상으로 두었을 때 아름답기도 한 법이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긴장감을 멈출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추측들을 어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입장 후, 생각보다 무대와 가까운 앞좌석에 앉게 되었다. 가까이서 관찰하니, 어스름한 불이 켜진 무대는 사진에서 본 것보다 조금 더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드레스의 여성이 노래를 하며 등장하고, 연극의 막이 올랐다. 여자는 말했다.

   “브라보,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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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언젠가 생기 있게 반짝거렸을 꿈들이 빛을 잃고 먼지가 되어버렸다. 이 연극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빛나던 항성이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해 백색 왜성이 되어버리는 이야기. 이미 죽어버린 빛을 부여잡고 살아있다, 살아있다 최면을 거는 안타까운 노력. 근래에 보고 읽은 이야기 중에 가장 비극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이야기는 크게, 인물들이 등장하고 서로 충돌하는 전반부와, 갈등이 격해지면서 진실과 거짓이 드러나는 후반부로 나뉜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오직 네 명 뿐. 남편은 현재 무직 상태로, 몇 년간 계속 논문과 씨름하며 교수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왔다. 원래 피아노를 치던 아내는 남편의 어머니가 남긴 보신탕집을 운영하며 남편의 꿈을 이루는 데에 여념이 없다. 교양 있어 보이는, 지식인에 속하는 그들의 현재 삶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지만, 오직 미래를 그리며 모든 것을 견딘다. 이런 그들에게 갑작스레 개장수 일을 하는 남자가 손님으로 찾아온다. 아내의 가게에 개를 대주고, 그녀를 누님이라 부르는 그 남자는 여러모로 남편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편은 과거 어머니가 운영했던 보신탕집에 대한 기억 때문에 개 냄새가 참 싫다. 매일 먹는 음식이 보신탕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고. 그래서 남편은 그 손님이란 사람도 참 싫다. 반면 남자는 누님의 남편이 참 불편하다. 저돌적이고 솔직한 자신에 비해 누님의 남편이란 사람은 고상해 보이고 싶어하고,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 사이에서 당황한다. 남편은 개장수 남자의 억센 모습과도 잘 어울려주는 아내를 보며 심기가 불편하다.
 
   셋이 모여 식사를 시작하고, 모든 걸 잊겠다는 듯 미친 듯이 웃어보지만 식사가 진행될수록 희극적으로 표현되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그 손님과의 관계로 인해 남편이 아내를 추궁하기 시작하자 아내는 화가 난다. 자신이 남편의 꿈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데, 자신의 다른 모습을 두고 그렇게 배척하다니. 아내는 사실은 아버지가 포르노 영화를 찍었으며, 자신은 그 현실을 부정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담배도 폈다고 악에 받혀 소리친다. 아내의 비명 섞인 이야기에 남편은 충격을 받고 화를 내다가, 본인이 숨겨온 진실을 끄집어낸다. 사실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거라고, 일 한건 다 거짓말이고, 자신도 막일을 하고 있다고. 이제 꿈은 그만 꾸자고.
 
   하지만 반전은 아내가 남편의 그런 모습을 이미 짐작하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영원토록 꿈이라도 꿀 수 있도록 해달라고 외친다. 아버지를 기다린 어머니처럼 차라리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그들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점점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이윽고 결말은 모든 것을 씻어내겠다며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는 남편. 서로 눈을 감고 지냈던, 지금까지 쌓인 세월은 되돌리기엔 너무도 무거웠던 것이다.
 
 
 
   아마 그들의 몇 년 전, 시작은 아주 사소했을 테다.

   더욱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 파국을 맞게 된 남편과 아내지만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결혼을 했을 것이다. 한 때 남편은 순수하게 꿈을 꾸고, 아내는 순수하게 그를 응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남편은 어느 순간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이 꿈꾸는 삶과 현실의 괴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내도 닥친 현실에 전전긍긍해가며, 그리고 시시때때로 치미는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괴로워하며 보신탕집을 운영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꿈이 아니라 오직 남편의 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매 순간을 견뎠다. 그리고 아마도, 그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거짓을 선택하고, 거짓을 강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누구를 위한 꿈이고, 누구를 위한 거짓이었을까?

   남편과 아내는 각각 현실을 외면하고 거짓 현실 속에 살았다. 남편은 허세를 부렸고, 아내는 그 장단에 맞추었다. 허세는 자기보호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갑옷인 것이다. 이루지 못한 꿈도, 아내가 수고하는 현실도 부끄러워 남편은 도망쳐 숨고 갑옷을 둘렀다. 그리고 난 단지 그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이 뒤로는 막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겐 크나큰 반전이었다. 아내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사실을 말할 용기는 없었지만, 그녀의 꿈은 지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남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기며 본인의 삶을 희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괴로워보였다. 그러고 보면 극 초반부터, 그녀는 흐릿한 거울 앞에서 지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 거울 앞에 앉아 남편을 기다렸듯, 그녀 역시 남편을 기다렸다. 자기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숨기며 좋은 아내가 되려 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살아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꿈은 그러면 그럴수록 텅텅 비어만 갔다. 순수했던 꿈은 너덜너덜해지고, 꿈은 정말 꿈으로밖에 남을 수 없게 되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그 누구도 목적을 찾지 못했다. 서서히 목적이 도치된다. 꿈을 꾸기 위해 꿈을 꾸고, 살아나가기 위해 살아간다. 각박한 현실에 남은 건 서로가 아니라 서로의 가면 뿐. 시작은 진심이었을지 몰라도 고여 버린 시간은 진심을 썩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그들은 아마도 사랑했고, 꿈이 있었고, 서로를 생각했다. 그렇게 함께 살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시작이 꼬이고, 외면해오던 현실은 불고 불어나, 모든 것은 끝내 허상이 되었다. 정말, 마치 얼음 속의 맘모스처럼. 사실은 이미 죽은 시체일 뿐인 맘모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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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그들의 모습은 막연히 좋게만 느껴지는 ‘꿈’의 또다른 얼굴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의 말로를 지나칠 정도로 잘 보여준다. 무심코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따라오는 것들은 희망적인 것, 아름다운 것, 힘을 내게 만드는 것, 자유로운 것, 그리고 좋은 모든 것들이다. 꿈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에 비유되기도 하고,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력 같은 것들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꿈은 그런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 꿈이 닳고 닳아 그저 의무가 되어버렸을 때에도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꿈이라는 것이 껍데기만 남아 허례허식의 산물로 전락했을 때에도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연극은 그로테스크한 방법으로 꿈이 지닌 또다른 면면을 드러낸다. 꿈이 미래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오히려 꿈은 현실을 목조르게 될 뿐이다.
 
   달콤한 진실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오히려 달콤한 거짓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만큼 거짓된 것들에 손을 대기는 참 편하다. 거짓된 표정, 거짓된 말들, 심지어는 거짓된 생각까지. 하지만 마음은 불편해져간다. 시작은 쉬우나 끝은 어렵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처음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산으로 간다. 거짓이라는 것은 도전의 반대이고, 노력의 반대이고, 용기의 반대이다. 단어의 형태만 봐서는 안 와닿을지 몰라도, 삶 속에서 이것들의 의미는 전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위험하다. 거짓을 외면하고자 더 거짓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시간이 너무도 무가치해지므로.
 
   그런 점에서 이전에 관람한 연극 하퍼리건과 닮은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실제로 하퍼리건에서 연기하셨던 신용진 배우님이 이 맘모스 해동에서 손님 역할을 맡으셨기에 기시감을 느끼기도 했다. 연극 하퍼리건도 진실과 거짓에 대해 다루고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대응방식은 정 반대였다. 하퍼리건은 거짓의 베일을 벗겨 진실을 마주했고, 맘모스 해동의 남편과 아내는 거짓에 짓눌려 그들의 관계도, 시간도, 꿈도, 당장의 오늘도 모두 잃고 말았다.
 
   맘모스 해동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결말, 어쩌면 해결책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바로 세탁기였다. 극중에서 남편은 더럽다고 느껴지는 자신의 옷가지와, 손님으로 찾아온 남자가 개 냄새를 풍긴다고 느끼자마자 심지어는 그의 옷도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렸었다. 극 초반에 남편이 화장실에서 끔찍한 냄새를 만들어낸 장면이 있었는데 이를 생각하면 참 이중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자신이 몰랐던 아내의 삶을 알게 되고 그녀의 기대감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현실을 곧이곧대로 고했을 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그들의 관계가 무너진다. 그리고 남편은 외친다. 차라리 내가 이 세탁기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모든 것을 깨끗한 상황으로 돌려놓기 원하는 그 절박한 외침. 괴로울 정도로 생생한 현실 속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해결책이 제시된 것이다. 남편은 세탁기 속에 들어간다. 물론 세탁기 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 시간이 되돌아오지도, 그들의 관계에 새겨진 상처도 낫지 않을 것이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해결책이란 생각이 들면서 그만큼 가슴이 아팠다.
 
 
 
   이 이야기에서, 진실과 거짓은 있어도 옳고 그름은 없다. 오직 기쁨, 혹은 슬픔만이 남는 것이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자기 자신의 욕심이 되어버린 꿈, 파국으로 치닫는 그들의 관계, 긴 시간동안 수면 아래에서 반복되어온 진실과 거짓의 굴레.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고, 삶의 숨겨진 모습이다. 그들의 결말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극단적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잣대를 가지고 판가름하기도 힘들다. 삶의 테두리를 벗어던지고 그 굴레에서 초월하여 살아갈 인간은 없다. 현실은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문득 정신 차리면 어디론가 흐르고 없다. 시간이 지나 때때로 후회할 때가 오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도 없다. 인간은 조물주가 될 수 없다……. 항상 현실의 한계를 이고, 투쟁하고, 넘어지고, 부대끼며 살아갈 뿐.
 
   그래서, 그래서이다. 종내엔 그들을 보고 고작 운이 나빴다, 고 생각해버리는 게 한계인 것은. 그들의 선택에 대해 뭐라 할 수 없다.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 메어 하면서도 옳고 그름을 들이밀 수 없다. 그저 오직 마음 한복판에 남는 기쁨, 혹은 슬픔. 삶의 형태는 각기 다르기에 그들에게 덧붙이고픈 말도 수없이 많이 존재하겠지만, 잠시 모든 것을 덮어놓는다. 다만 안타까워한다. 그들의 비극적인 현실에, 그리고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것들을 공감하고 마는 스스로에게.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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