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빼고 빼고 또 빼서 완성되는 문학 ‘시’- 황인찬 시집 [구관조 씻기기][문학]

글 입력 2015.11.2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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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저에게 암기과목이었습니다.

“이 시어의 함축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의 갈래는 무엇인가?” 심지어 한 지역의 공무원 시험에서는 “이 시의 제목이 무엇인가?” “ 이 시는 몇 년도 작품인가?”라고 까지 물어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저는 아무런 궁금증도 없이 자습서에 나온 시어가 가지는 의미와 시의 갈래를 외웠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저는 시와 멀어졌습니다. 대학교에 들어오고, 친척언니가 저에게 시집 한 권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저의 메마른 정서를 조금 적셔 보라며 언니는 저에게 시집을 권했습니다. 제 책장에 읽는 유일한 시집입니다. 시 3~4편을 읽으니 도저히 읽을 수 가 없었습니다. 1000쪽이 넘는 전공 서적을 읽는 것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저는 아직도 중·고등학교 시절 방식으로 시를 읽고 있었습니다. 시를 읽고, 시를 나의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시의 정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는 저와 상관없는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즐겨듣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시를 다루는 편이 올라왔습니다. 처음엔 이번 화는 건널 뛸까 싶었지만, 시인이 직접 나온다고 하니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알아먹지도 못 하겠는 짧은 글(시)을 쓸까?’하며 말입니다. 팟캐스트를 들어보니, 적어도 황인찬 시인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먹고 살 문제를 고민하며 대학원을 다니고, SM 가수들이 부른 K팝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시가 더욱 궁금해 졌습니다. 적어도 그는 내가 모르는 어휘들로 혹은 어려운 표현들로 저를 어지럽게 하진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시집을 펴들기 전, 제 자신에게 다짐했습니다. ‘이번엔 정답을 찾으며 머리로 읽지 말자! 그냥 느끼자!’
그냥 느낀 시들 중, 저도 모르게 반복해서 느낀 시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왜 제가 그 시들을 반복해서 느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여나 제가 가진 느낌이 여러분들이 이 시를 느끼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며 그냥 시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유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처에서 젖은 풀이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게 너무 생생해서
실감이 나질 않았다
 
여중생들이 비를 맞고 신났다 이 또한 실감 나지 않았다
달리는 차들과 그것들이 튀기는 물과 깜박이는 불빛의
긴 꼬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거
기엔 물이 이미 차 있었고,
알지 못 하는 사이에 계절이 흘렀다
 
비가 계속 내렸다 비를 실감할 수 없었다
물에 비친 검은 머리카락 영혼들이 내게 손짓했다
 
계절감이란 말이 좋았다 계절이란 말보다
 
몸이 자주 부었다
 




<서클라인>
 
지하철을 타면 편하다
노인이 앞에 서면 불편하다
 
지하철이 지상에 도달하자 빛이 쏟아진다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노인은 여전히 앞에 서 있다
눈은 빛에 익숙해졌고
 
지하철이 흔들리고 있다
 
노인의 뒤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다
 
노인들은 왜 낮에만 지하철을 타는가?
열차는 내선 순환하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눈은 다시 어둠에 익숙해지고
 
선릉역, 선릉역 말하자 선릉역에 서는 것
 
    

 
<여름 이후>
 
어젯밤에 경미가 죽었다
 
수영이는 아빠랑 싸웠고 재희는 자동차에 치였다 예나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미연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책상 위에 흰 국화가 놓여 있다
애들은 교복을 입고 있다
 
수업 시간에 마음이란 걸 배웠다 죽어 버린 경미도 마
음을 아느냐고 연아가 물었다
 
은혜가 둘 중 누구랑 사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주에 정화는 먼 곳으로 떠난다 선주는 꿈에서 연예인
을 봤다
 
경미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경미는 애들 마음속에 살아 있고
애들은 아직 살아 있다
 
승희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미라는 며칠째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다 애들은 미라가 가출했다고 믿는다
 
책상 위의 흰 국화는 노란 국화였다
애들은 체육복을 입고 있다
 
 


 
<낮은 목소리>

성가대에 들어간 것은 중학교 때였다
일요일 오후엔 찬양 연습했다
끌어내리듯 부르는 것이 나의 문제라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의자와 거기 울리는 소리가 좋았다
 
말씀을 처음 배운 것은 말을 익히기 전의 일이었다
그것을 배우며
하나님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목소리가 커졌다 잦아들었다
 
공간이 울고 있었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소리가 있어
 
계속
눈앞에서 타오르는 푸른 나무만 바라보았다
 
끌어내리듯 부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어려서 신을 믿지 못했다





<저수지의 어둠>
 
우리는 말없이 헤드라이트의 빛만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과 슬픔을 모르는 척했고
터널이 빠르게 지나갔다
 
끝없이
앞으로 뻗어 가는 빛
 
저수지에 도달하기까지
그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저수지에는 깊이가 없고 내면이 없고
저수지에 비치는 것은 저수지 앞에 서 있는 것들
 
저수지 내부의 무엇인가가 그 안으로부터 튀어 오르리
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저수지의 수면이 생명을 얻은 무엇인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수지에는 깊이가 없고 내면이 없고
끝없이 앞으로만
돌아오지 않고
 
우리는 지나갔다
저수지에 도달하는 일은 없었고
 
저수지 내부의 무엇인가가 그 안으로부터 튀어 오르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독개구리>
 
내가 잡아온 독개구리 한 마리 예쁘다 개골거린다 죽은
척 가만히 있는다 만지면 독이 오른다 그런데도 나는 잡아
왔지 손이 퉁퉁 부었다
 
저녁이 오는 것을 나는 본다
검은 두 눈으로
 
내가 어제 접어 놓은 시집에는 개구리가 없다 청개구리
는 독이 없다 아프리카 독개구리의 독은 극소량으로 인간
을 죽일 수 있다 이곳에는 생활이 없다
 
방바닥에 들러붙은 마사지 오이가 말랐다 뜨끈한 기운
이 올라온다 독개구리가 먹는 것은 산 것뿐이다
 
사위가 어둡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밀린
일을 생각하고 옛 애인을 생각하다 읽던 시가 생각나 시집
에 손을 뻗다
 
책상 위에 앉은 그것을 보았다
 
나는 극소량의 공포를 느꼈다
    




<모두 잘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위대한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이 있었다 그다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은....과....”
 
몰려드는 졸음을 견디며 나는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칠판에는 diegesis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
지는 알 수 없었다
 
수업은 정오에 시작하고 오후 세 시면 끝난다
두 시간이나 남은 강의를 나는 견딜 수 가 없었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낙서를 하며, 가끔 강의를 들었다
 
서사라는 말이 들렸고, 프레임이라는 말이 들렸다 서사
의 3요소가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필기하지 않았다
 
대학 수업의 구조가 지닌 정교함을 생각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나무와 검은 물 자국의 번짐을 생각하지 않
았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책의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았고
 
나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되풀이되는 서사와 서사들
 
나는 눈을 감으며
이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강의실의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 배열된 책상과 걸상들이 보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장막의 뒤에서 자꾸>
흔들리는 것이 있는데, 어두워서 보이진 않는다 너의 손
의 온기를 느낀다 얼마나 지연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공
연이다 사람의 소란과 사람의 침묵이 번갈아 일어서는 것
과 무관하게
 
 
나는 보았다고 너는 말한다 무얼 보았느냐는 물음엔 답
하지 않고 분명 보았다고
 
장내에는 창이 없어서 너는 시간을 잊은 듯하다 건너뛰
는 듯도 하다 아예 공연을 기다린 적이 없는 듯하다 어둠
속에 오래 있어도 어둠에 눈이 익지 않는다
 
그런데도 흔들리는 것이 있는데,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
쓰다 실패한 듯하다 저 뒤에서 자꾸 실패가 흘러나오는 듯
도 하다
 
장막을 상상한 적 없다고 너는 말한다
그런데도 장막이 느껴진다고, 의미심장하게 펄럭이고 의
미 없이 침묵한다고, 어두운 불의 형상으로, 몸을 떠난 영
혼의 옷자락으로
 
저 너머에 흔들리는 것이 분명 있는데,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들어 너의 손을 잡는다 너는 언제부터 이곳에 없던
것일까
보이지 않는 어둠이 계속 보이고 있다
    




<의자>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았다
병원 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형은 나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아프다고만
선생님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 하셨다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였다
앉아서 생각해 보라고, 잘 생각해 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울어 버렸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져서




 
<혼자서 본 영화>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와 영화를 봤다
 
그건 일상의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였고,
가는 비가 내리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가 계속되었다 그건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배우의 눈썹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영화가 끝나자 스탭롤이 올라갔다 그는 죽어 가는
군인이 휘파람을 불 때 조금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고,
내가 말해도 그는 믿지 않는다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
비옷을 입은 아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점점 ‘시’가 설 자리가 좁아지는 상황에서, 황인찬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자리’를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되새겨 보셨으면 합니다.
“공감을 한다는 건 ‘난 이걸 알아’라는 태도잖아요. 그러면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요. 어떤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의 자리는 공감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 내려면 ‘이게 내가 알던 건가? 내가 알던 게 이게 맞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생경함의 자리, 놀라움의 자리로 가야 되는 것 같아요”
 



 
참고자료

- 기사 소년의 착각해줘 - 시인 황인찬/ 장우철 에디터/GQ korea
- 기사 [시인특집] 황인찬 “한 번에 읽히는 시가 좋다” / 임나리 글/ 채널예스
- 시집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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