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넘버를 통해 다가가는 비운의 여인,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예술]

- 뮤지컬 넘버 11곡으로 이해하는 엘리자벳
글 입력 2015.08.01 03:1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자유를 동경했던 비운의 여인,
뮤지컬 '엘리자벳'

- 뮤지컬 넘버 11곡으로 이해하는 엘리자벳


엘리자~1.JPG
 

  백성을 지혜롭게 통치한 군주도, 역경을 이겨내고 업적을 이루어낸 위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흔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도 아니다.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한 아름다운 황후’라는 포스터 속 타이틀만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뮤지컬 엘리자벳은 의구심을 들게 할 수 있다. 홍보 카피 속 내용처럼 로맨틱한 내용도 아닐뿐더러, ‘엘리자벳’ 개인에 초점을 맞추기엔 그 소재가 부족하다는 감이 없잖아 있다. 황후 엘리자벳의 화려한 삶이 비참한 불행으로써 극적인 끝을 맺지만, 이는 그녀의 말년까지 계속된 우울증으로 얼룩진 데 기인한 점이 크다. 극은 시종일관 ‘자유’를 갈망하며 노래하는 엘리자벳과, 그런 그녀의 우울증을 함께 따라다녔던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 자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가 왜 그토록 자유를 찾는데 자신을 가두고자 했는지 의문이 남을 뿐이다.

 
  이렇게 극을 보며 채울 수 없었던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자벳이라는 뮤지컬에 난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는 비어있는 극의 틈 사이사이를 나름대로 메워주는 매력적인 넘버들이 존재하는 덕분이다.
  엘리자벳의 넘버들이 가진 마력은 단순히 음악적 차원을 넘어, 극을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을 채우는 41여개의 넘버들은 대부분 멜로디가 짝을 이루어 반복 혹은 변주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각각 쌍을 이루는 선율은 서로 정반대이거나 뒤틀린 상황, 변화하는 엘리자벳의 감정선을 더욱 풍부히 하기에 제격이다.
  그렇기에 인상적이었던 넘버 위주로, 엘리자벳의 상황과 감정을 해석하며 글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300px-Erzsebet_kiralyne_photo_1867.jpg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유제니(Elisabeth Amalie Eugenie)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의 연인’이라는 애칭과 함께 많은 오스트리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에 뛰어난 미인으로 유명했으며, 시씨(SiSsi)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사촌지간인 프란츠 요제프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대공비 소피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자식에 대한 양육권을 빼앗긴 이후 잇따른 딸의 죽음, 남편의 외도로 엘리자벳의 우울증은 점차 깊어지고 왕궁을 떠나 방황하며 말년을 보낸다. (한편 엘리자벳은 헝가리 자치를 지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이후 그녀의 아들 루돌프 또한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가 된다.)






- 1막 -


 #1 당신처럼(Wie Du)  ◀ https://youtu.be/O0SEOqOGiXw
                                                                                     
 
8810812041380594326.jpg
 

  꿈꾸고 시를 쓰면서 말을 타고 외줄타기를 좋아하는 어린 시절의 엘리자벳이 담긴 밝고 경쾌한 곡이다. 노래 속에서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아버지 당신처럼 되고 싶어한다. 엘리자벳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에서는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아버지는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숲속을 거닐어 보거라. 나무와 들풀, 꽃과 동물들과 함께하는 너에게 신이 위안을 줄 것이다”며 엘리자벳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둘도 없는 친구이다. 그런 그녀가 어릴 때부터 왕실의 예법보다는 뛰노는 것을 좋아하는 말괄량이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주로 태어난 탓에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는 엘리자벳은 점차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2 날 혼자두지 말아요(Nichts Ist Schwer)  ◀ https://youtu.be/k8080LI_lwg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엘리자벳에게 청혼하는 장면을 담은 곡이다. 이는 그녀가 불행한 궁정생활에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며, 아직 어린 엘리자벳의 철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무와 굴레 속에 꿈이 깨진데도, 나와 결혼해주겠소?” 라는 요제프의 물음에,  “꿈은 여기있죠. 당신의 곁에서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죠”라며 답하는 엘리자벳. 누군가 내 모습 그대로를 좋아해준다는 사랑의 감정 또한 엘리자벳이 지금껏 가지지 못한 것이기에, ‘이것도 자유가 아닐까’ 하는 호기심에 결혼을 덥석 받아들였던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결혼 생활 후, 엘리자벳의 삶에는 줄곧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황실의 예법을 강요하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대공비 소피.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반대해요“라 외치는 엘리자벳.
남편인 요제프는 복종 또한 황후의 의무이니 어머니 뜻대로 따라달라며 엘리자벳을 외롭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부르는 곡이 바로 ‘나는 나만의 것’이다.
 


 #3 나는 나만의 것(Ich Gehör Nur Mir)


 

  극의 대표곡이라 불릴뿐더러, 가사 또한 희망과 확신에 차있는 곡이다. 때문에 극을 보기 전까지는 엘리자벳이 끝내 당당하게 자유를 외치는 곡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 이 곡이 나오는 시점은 궁정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결혼 초기였기에, 그 어떤 강요도 의무도 제쳐둔 채, 오로지 나의 삶을 살겠다는 엘리자벳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를 더욱 더 옥죄어오는 황실의 제약들이 그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마냥 꿈꾸었던 자유에 대한 동경, 환상을 겉잡을 수 없이 커지게 하였다. 게다가 두 어린 딸을 대공비 소피에게 넘겨주어야 했으니, 자신이 가진 것조차 빼앗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갈망하는 자유는 그녀를 가두어두는 예법들과 대공비 소피에게서 벗어나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삶을 살고자 한 것이었다.
    


%5B엘리자벳%5D_나는_나만의_것(REPRISE)_옥주현_EMK제공.jpg
 

#4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 
(Elisabeth, Mach Auf MeinEngel)  ◀ https://youtu.be/ZJAga6EABHg


  엘리자벳은 자신을 찾아온 요제프를 거부하며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뜻을 따르길 요구한다. 엘리자벳이 원하는 자유는 ‘나는 나만의 것’에서 이어진, 대공비 소피에게서 벗어나 요제프와 온전히 마주한 삶이다. 서서히 우울증이 찾아오는 엘리자벳에게 죽음이 손을 내밀지만, 그녀는 그것을 뿌리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라 말한다.



#5 나는 나만의 것 Reprise (Ich Will Dir Nur Sagen)


2005년 빈 공연 실황 영상


  앞서 언급된 ‘나는 나만의 것’의 멜로디가 반복된 곡이다. 다만 요제프의 태도와 엘리자벳이 원하는 자유가 그 때와는 달라졌다. 요제프는 이제 그녀의 뜻을 따르며 루돌프를 그녀의 손에 맡기고자 하지만, 엘리자벳은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며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1막 내내 엘리자벳은 이렇듯 끊임없이 죽음을 거부하며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극심한 우울과 절망에 빠져있을 때 잠깐씩 우리 뇌리를 스쳐가는 죽음의 유혹처럼, 엘리자벳 또한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와 죽음에 대한 이끌림이 공존했다는 생각이 든다.
 




- 2막 -

 
엄마 어디 있어요-내가 당신의 거울이라면-추도곡
:자유를 찾아 떠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간절히 원하는 아들이 담긴 곡들이다.


#6. 엄마 어디 있어요(Mama, Wo Bist Du?)


   자식들을 간절히 원했던 엘리자벳은 정작 아들 루돌프를 돌려받자 그를 외면해 버린다. 분명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키우겠다는 자유를 이야기했는데 오히려 아들이 곁에 있는 지금, 그는 안중에도 없다.
  그토록 원했던 것을 얻고 나면 더 이상 꿈이나 환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루돌프가 자신의 삶에 또 다른 굴레가 될 것이라는 현실에 마주해서일까, 혹은 엄마로서 행복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기 두려운 피해의식에서일까. 미워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 알지만, 그렇기에 아들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바라보려 하지 않는 엘리자벳이 안타깝기만 하다. 
 


11_23_15__4fe285931afba[W578-].jpg
 

#7 내가 당신의 거울이라면(Wenn Ich Dein Spiegal Wär) 


  어른이 된 루돌프는 지금껏 한번도 먼저 손을 내민 적이 없는 어머니에게, 간절히 손을 건네고 있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루돌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뿐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끝내 그 손을 뿌리친다. 그 손을 잡게 된다면, 이제껏 자신이 찾아 헤맨 자유가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해서 일까, 혹은 엄마로서 아들에게 한번이라도 따뜻이 대해주지 못한 뒤틀린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지쳐서일까.



#8 추도곡(Totenklage)  ◀ https://youtu.be/qYxEaONSvYU


  자살한 루돌프의 관을 움켜잡고 추도곡을 울부짖는 엘리자벳의 모습은 너무도 애처롭다. 앞서 루돌프가 부른 곡 ‘엄마 어디에 있어요’와 그 곡조가 일치하기에 모자 간의 감정이 더욱 구슬프게 느껴진다. 엄마를 그토록 찾던 아들의 노래는 결국 고작 자유를 찾겠다고 아들을 외면해온 엄마의 한과 죄책감이 된 것이다.
 
  

72641844.2.jpg


#9 아무것도(Gar Nichts (Irrenhaus-Ballade)


베를린 공연실황 영상
  

  루돌프가 자살하기 전, 엘리자벳은 요제프의 외도 소식을 듣고 왕궁을 벗어나 각지를 떠돌게 된다. 왕궁과 요제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전히 채우지 못한 자유를 찾아 떠난 그녀지만,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이십여 년을 떠돌다 도달한 곳은 정신병원이다. 절망의 심연에 빠진 그녀가 부르는 곡이 바로 이 ‘아무것도’이다.


“난 영혼이 묶였어.
난 모든 것에 맞서 싸웠지만 난 뭘 이루었나, 아무것도.
내게 구원은 오직 광기 그 뿐. 내게 구원은 오직 죽음 뿐.
끝도 없는 심연. 그 끝에 서있는 나는 왜 이리도 두려울까“
 

  1막의 ‘당신처럼‘에서, 자유로이 외줄타기를 하며 보냈던 그녀의 어린시절 모습이 겹쳐지는 곡이다. 어린 시절, 외줄 위에 올라서, 발밑의 세상을 그저 자유라 생각했던 엘리자벳. 그런 그녀가 서 있는 외줄 위는 이제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수많은 세월 자유를 갈구해왔지만, 자유가 현실이 될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그녀에겐 허망과 고독이 찾아왔다. 그녀가 위태롭게 홀로 디디며 서 있는 외줄. 그 발밑엔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심연뿐이다. 그녀가 원했던 자유 또한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처럼 그녀 자신도 모호한, 닿을래야 닿을 수 없는 막연한 환상이 아니었을까.



#10 당신처럼 Reprise(Wie du (Reprise))


14-15년도 Roberta Valentini 주연의 엘리자벳


  1막의 <당신처럼>의 멜로디가 트위스트되며 우울한 곡조로 절묘하게 변화하였다.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의 환상을 어른이 되어 마주한 엘리자벳의 모습은 쓸쓸하고 공허하다. “자유를 원한다며 스스로를 왜 가두냐”는 아버지의 말에 엘리자벳은, “이젠 알아요, 아빠처럼 될 수 없단 걸“이라 답한다. 자유는 이제 더 이상 꿈도 환상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채, 그녀에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절망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11 베일은 떨어지고(Die Schleier Fällt)




  결국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의 칼에 찔리게 되는 엘리자벳. 그녀는 그토록 거부하며 벗어나고자 했던 죽음을 다시 만난다. 1막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에서 자유를 주려는 죽음을 뿌리치며 스스로 살아 자유를 찾겠다던 엘리자벳은 이제 죽음의 손을 잡는다.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와 더불어 ‘나는 나만의 것’과도 멜로디가 일치하며, 1막과 완전히 뒤바뀐 그녀의 상황, 감정을 암시하는 곡이다.




 
  과연 엘리자벳은 죽음이 준 자유 속에서 구원받았다 할 수 있을까? 이는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벳은 영원한 안식과 자유를 향해 죽음을 택했지만, 그녀가 원했던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오랜 세월동안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던 그녀가 최후에 죽음이 건넨 손을 잡았다는 것은, 벼랑 끝까지 내몰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던, 절망이 한계에 치달아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지켜내고자 꼿꼿이 견뎌왔던 엘리자벳,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한 그녀가 내릴 수 있었던 마지막 결단은 바로 죽음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엘리자벳이 진정으로 원한 그 자유라는 것은 무엇이었나? 자유가 삶의 의미이자 전부였던 그녀지만 자신 또한 그 자유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엘리자벳에게 자유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억압된 생활과 함께 품어온,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다. 점차 어른으로 자라며 그녀를 조여 오는 압력은 더욱 거세어졌고 자유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지만, 여전히 이렇다 할 수 없는 모호한 것이었다. 대공비 소피에게서 벗어나 요제프와 자식들을 자신의 품으로 돌려받았을 때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왕궁에서 벗어났을 때에도 그녀는 언제나 자유를 원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유라는 환상에 자신을 속박하며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여유조차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또한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면 더 이상 환상이 아니듯, 그녀 또한 꿈꾸었던 이상과는 다른 자유가 주어진 현실에 공허함과 허탈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회피해온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신을 나락으로 몰고 갔던 것은 아닐까.
   
 
죽음과 우울 위에 외줄타기 하던 엘리자벳, 그런 그녀가 황후가 되기엔 그 짐이 너무도 무거웠다.
‘나는 나만의 것’에서 ‘아무것도’에 이르기까지, 삶의 주인이 되길 원했던 비운의 여인을 담은 뮤지컬. 바로 엘리자벳이다. 


11325183_679234495541604_1858494713_n.jpg
 




사진 출처_ EMK 뮤지컬 컴퍼니
자료 출처 _ 위키피디아-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아트인사이트(http://www.artinsight.co.kr)


[심한솔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