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탐구] 악몽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 '프리다 칼로'

글 입력 2014.12.2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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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그 자체인 삶 속에서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미술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러한 열정은 오늘날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류화가를 탄생시켰다.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 1907년에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1913년, 6세 소아마비를 앓고 1925년, 18세 때 전차사고를 당하면서 쇠창살이 몸을 관통하여 자궁이 손상되고 오른다리에 11군데 골절, 오른발 탈골, 왼쪽 어깨 탈골, 요추와 골반, 쇄골 하나, 갈비뼈 두개 치골에 골절상을 입는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인 경험을 하며 평생에 걸쳐 32번의 수술을 받는다. 본래 여의사가 되고자 했던 프리다 칼로의 꿈과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듯 했지만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서 슬퍼하는 딸을 위해 사진가였던 프리다칼로의 아버지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수이젤을 제작해주었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살고 싶었고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것이 끔찍하게 지루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그러지 않았어요.” <영화 프리다 중에서>

그 때부터 그녀의 숨겨져있던 재능이 빛을 바랬다. 그림의 주제는 오랜 시간을 보낸 병원에서의 자신의 모습, 친구,가족이었다.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진사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사실적인 수법과 판화공방에서 습득한 묘사력, 그리고 동시대의 미술경향에 대한 지식들을 결합시킨 초기 작품을 보여준다.

그녀는 멕시코의 벽화 화가이자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남편 디에로 리베라와의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대외적인 화가로써의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다. 끊임없는 리베라의 외도와 계속되는 유산으로 내적인 심리적 고통은 나날이 심해져갔고 프리다는 심적인 고통이 커갈 때마다 걸작을 그려내었다. 내면적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해내는 능력이 뛰어나서인지 점차 디에고의 그늘 아래 있었던 그녀의 진가를 사람들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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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후 그 충격을 그린 그림 <헨리포드 병원>

1934년 미국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후 칼로는 남편과 자신의 여동생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심적 충격을 받았다. 배심감과 좌절로 한동안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1936년 세 번째 오른발을 수술했고, 척추병으로 인해 너무나 아픈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육체적 고통은 칼로가 작품에 더욱 매달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936년 이후 칼로의 작품은 기법에서도 풍부해 졌으며, 그녀 삶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직관과 세밀한 통찰력으로 더욱 세련된 기교를 표출하고 있다. 1938년 칼로는 초현실주 의의 거장인 앙드레 브르통을 만났다. 브르통은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이라 보았고, 더불어 칼로를 초현실주의자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 해 11월 뉴욕의 쥴리앙 레비(JulienLevy)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때 화랑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전위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다루는 화랑은 더 적었기 때문에, 칼로의 전시회는 중요한 문화적 사건으로 여겨졌다. 첫 개인전에서 칼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경제공황이 미국전역을 휩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된 총 25점 중 반이나 팔려나갔다.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 중 상당수가 화가에게 새 작품을 의뢰했을 정도로 성공했다.

1939년 프리다 칼로는 처음으로 뉴욕과 파리에서 국제 전시회에 참가한다. 브르통의 제안을 받아 들여 파리 피에르 콜르(PierreColle)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어 피카소, 칸단스키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참 유행하고 있는 초현실주의 모임에 동참하면서 그녀의 작품들은 더욱 강한 초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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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나에게 준 것(What the Water Gave Me, 1938)』은 대표적인 예이다. 

1940년 멕시코에서 열린 대규모의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두 명의 프리다(TheTwoFridas,1939)』와 『상처 입은 탁자(The Wounded table,1940)』를 출품하여 더욱 명성을 날렸다. 남미의 화가로서 처음으로 루브르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예도 안았다. 그 이후 주요 단체의 전시회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칼로의 명성은 드높아가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라 에스메랄다 공립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이후 10년 동안 재직하게 된다. 1944년 또다시 건강이 악화, 척추 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하게 된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대해 탐구하게 되고 그 고통을 회피하기 보다는 당당히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부서진 기둥(TheBrokenColumn,1944)』에서 칼로는 그녀의 다친 척추를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기둥은 심하게 부서져 있고, 정형외과용 코르셋의 내부 장치가 간신히 이를 지탱해 주고 있다. 그림 속의 칼로는 울고 있지만 굳게 다문 입과 표정은 강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 온몸에 박힌 못들은 예수의 고통을 상징하듯 보이며, 인간구원의 자기희생적 이미지까지 보여준다.

1946년 계속되는 건강악화로 결국 뉴욕에서 필립 박사와 윌슨 박사에게 척추접합수술을 받게 되었다. 칼로는 다시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다. 작업도 하루에 몇 시간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칼로는 이런 육체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작품 활동 외에도 정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50년대 칼로는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오른 발이 썩어 들어가는 회저병이 생겨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영국 병원에서 받은 골수이식수술은 세균감염으로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런 연속된 수술로 인해 칼로는 거의 죽음의 상태로 빠져 들었다. 칼로는 힘이 허락하는 한 그림을 계속 그렸지만, 육체의 붕괴는 어쩔 수 없이 그림에 흔적을 남겨 산만하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칼로는 그 뒤로 주로 정물화를 그렸다. 이 기간의 칼로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계속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다.이 시기의 정물화의 소재들은 집 정원에서 따거나 현지 시장에서 사다가 칼로의 옆 테이블에 놓아둔 것이다. 『살아있는 자연(Living Nature,1952)』과 『생명의 과일(FruitofLife,1953)』등에서 보여지듯이 빨강,노랑,초록 등 최소한의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며, 형태의 윤곽선도 배경에 흡수되고 표면자체도 거칠어진다.칼로는 이런 과일에 깃발이나 평화의 비둘기,문구 등을 곁들여 작품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말년에 칼로의 작품은 더욱 정치적으로 변했지만, 그녀의 초창기 작품 속에서도 섬세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칼로는 독립적인 멕시코 문화를 강조하는 정치적 입장을 통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의 라틴아메리카의 뿌리를 찾게 되었고,이것이 작품에 반영되었다. 1953년 멕시코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 기회를 얻는다. 전시장소는 프리다의 친구 롤라 알바레스의 소유로 멕시코 시티에 위치한 ‘갈레리아 데 아르테 콘템포라네오(현대 미술 갤러리)’이다. 역사적인 개막식 날, 프리다의 병세는 너무 악화되어 지인들은 상의 끝에 카사 아술의 침대를 갤러리에 옮겨 프리다의 그림들 사이에 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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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그녀는 오른쪽 다리에 생긴 괴저로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해내었다. 그녀는 1954년 4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프리다 칼로는 1954년 자신의 생일을 보낸 1주일 후인 7월 13일 47세의 나이에 합병증인 페렴에 걸려 사망하였다. 오늘 날에 프리다 유골은 고대 멕시코 공예품 단지에 담겨 가장 편안했던 마음의 고향인 코요아칸의 파란 집 ‘카사 아술’에 안치되어 있다. 카사 아술은 1958년에 ‘프리다 칼로 박물관’으로 새 단장하여 개관되었다. 작업실엔 프리다가 앉았던 휠체어가 아직도 있고, 침실엔 프리다가 잤던 높은 침대, 옷장엔 프리다가 입고 있었던 옷들이 보관되어있다.

이미 생전에 수집가와 애호가들에게 좋은 가격에 그림을 팔 수 있었던 프리다였지만,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선 자화상 한점이 3백20만 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이는 디에고의 작품보다 훨씬 뛰어 넘는 가격이다. 프리다의 그림은 경매에 나오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소장가치가 더 크다고 여겨지고 있다.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아내로서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뛰어난 예술가로서 화가로서 당찬 혁명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프리다칼로. 그녀의 작품을 가만히 보고있자면 눈물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녀가 느꼈던 슬픔과 고통이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프리다칼로에 대해 참고할 만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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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클립뱅크(Clipbank) - 멕시코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Mexican Female -Painter, Frida Kahlo)

참고자료 

-클라우디아 바우어/ 프리다칼로/2007 

-Andrea kettenmann/ frida kahlo.leid und leidenschaft.koln et al./2003

-줄리 테이머 / 영화 프리다 /2002

-EBS 클립뱅크(Clipbank) - 멕시코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Mexican Female -Painter, Frida Kahlo)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르 클레지오 지음 | 신성림 옮김 | 다빈치/2008

-유경희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넌 나의 뮤즈, 난 너를 창조했네”/2014

[박효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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