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가 하늘에서 내려와 머리 위에 닿았다. 처음 겪는 방향이었다. 소리가 진작에 천장 아래까지 올라가 '우르릉 쾅쾅' 무언가를 끼얹고 있었다. 나는 온갖 빛 번짐에 뒤늦게 고개를 번뜩 들었다. 고작 내 손안에서만 붙잡히던 선은 어느새 양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물었다. 교향곡이 왜 좋으냐고. 그때부터 오늘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
첫술부터 아마 눈치를 빨리 챘어야 했다. 오늘의 바이올린에는 '이지윤' 말고 또 하나의 초대 손님이 있었다. 그는 본인뿐만 아니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들고 나타났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독일 오케스트라와 서울 오케스트라의 협연이라니. 이런 건 미리 예고를 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나는 이지윤이라는 바이올린에서 '오케스트라'를 느꼈던가? 드보르자크가 듣는 이를 외롭게 만들지 않는 곡을 써낸 탓도 있겠고, 그날의 바이올린이 절대적으로 '혼자'가 아니었던 탓도 있다. 사운드적으로도 그렇고, 연주자가 연주를 하며 바라보는 방향도 그랬다. 서울시향과 시시각각 합을 맞춰야 하는 지점에서는 거의 지휘자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함께 나아갈 타이밍에는 꼭 그 뒷모습을 관객에게 맡겨둔 채 단원들과 소통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는데, 저 바이올린이 내놓는 사운드는 혼자 다른 공간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자까지는 우리가 같은 롯데콘서트홀에 있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교회나 성당 한가운데서 들려올 법한 울림이 네 겹으로 들려온다. 어디서 네 겹을 느꼈냐고? 그냥 그의 소리가 일직선으로 이쪽에 꽂혀 오는 게 아니라, 활과 현이 만난 지점부터 소리가 부채 모양이 되어 이쪽으로 끼얹어진다.
바이올린이 이렇게 '뮤지컬적'일 수가 있다니? 거기다 딕션은 또 어떤가? 신경을 하나도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섣불리 올곧다고 말해버리면 오히려 뭔가를 놓치는 게 아닐까 싶은, 소리 안쪽에 숨어 있는 수직적 분명함이 내 귀에 꽂혔다.
그래, 이건 아무리 봐도 서울시향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협연이다. 아래쪽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상황'에는 유독 거리감이 확 느껴졌다. 이게 지금 내가 익숙하게 들르곤 했던 이곳에서 나던 소리가 맞나? 얼마 전 간담회에서 뵈었던 연주자들도 분명 저기에 계시고,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들이 몇몇 보이는데 저 소리 안에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관객석도 유달리 조용했던 날이었다. 기침 하나 없이, 어찌 1악장을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여기가 2악장이라고 일러주듯 바이올린이 정해진 때에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1악장이 빨리 지나갔나 싶은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다.
이지윤 바이올리니스트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소리가 가장 깊게 닿은 부분, 그러니까 악기와 연주자만이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중앙의 부분이 대단히 새카맣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엄청 단단하다. 그러니까 엄청 짙은 고동색인데, 딱 우직한 그 지점이 듣는 이에게는 '든든함'만을 줄 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리의 가장 밑바닥만 제외하면 굉장히 '자유'로운데, 그 자유로움이 지나치게 '안정'적이다. 거기다 기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성량의 폭도 엄청 넓어 보였다. 가끔 바이올린이 노래할 때면 사람 목소리를 닮아 있을 때가 있는데, 이 악기에서는 애초에 가성 자체가 없다. 무조건 두성이고 진성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콧바람이 아예 없고, 물러나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는,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일처럼 보이는 '직진'만이 존재한다. 어떻게 이렇게 혼자 있는데, 함께일 수가 있을까? 너무 신기했다.
막 다정하지도 않다. 근데 막 매정하지도 않다. 대단히 황홀해 보라고 소리가 너풀거려주지도 않는다. 근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내 앞에 허리를 펴고 양손을 무릎에 얹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무조건 뭔가를 '표현'할 필요 없이, 대단히 튈 필요도 없이 내 뒤편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이만큼이나 행복해질 수 있다.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완성도가 일정 수준, 그것도 굉장히 높은 상태에 다다라 있는 사람들이 걸어나가는 음악을 이렇게 만나게 되면 우리는 자꾸만 서로의 연약한 지점을 건드리게 된다.
나는 어느샌가 의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드보르자크의 품이어서, 이지윤이라는 주황빛이, 서울시향이라는 온전한 바람이 곁에 있어서.
3악장이야 말할 것도 있는가? 다만 내가 음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세차고 얇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거기에는 없었다. 이지윤이라는 노을을 만나 꽤 친근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빗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안정되고 심지가 굳으면서도 망설임 따윈 하나도 없는 정직한 길을 걷는 바이올린! 어떻게 이렇게까지 홀로 다채로울 수 있을까? 그러면 그와 함께하는 오케스트라는 얼마나 사운드적 완성도가 높은 걸까. 별의별 생각이 절로 따라왔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바이올린(연주자)가 존재한다. 언제 다 만나보지...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1번
관악기 한 대가 눈길을 그려내고 있으니, 하늘에서 뭐가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것이 거의 내 곁에 다 와서야 고개를 번뜩 들고 만 것이다.
나는 한 층 올라간 좌석에 있으니 단원들이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저 아래에서 이곳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내가 그들에게 시선을 다 뺏긴 틈에 소리는 진작 올라가 천장 아래를 점령하고 있더라.
이 공연을 관람하기 며칠 전, 나는 혜화에 있는 실내악 공연을 보기 전에 지인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다.
"교향곡이 왜 좋아요?"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도 금세 답을 해줬다.
"영화 같잖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역시 교향곡에는 그런 매력이 있구나 싶으면서도 그 '영화' 같다는 느낌이 애호가들에게 어떤 매력을 주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4악장이나 되는 그 긴 여정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주인공이 없는 그 틈에서 나는 도대체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가? 그런 걱정을 많이도 했는데, 이날 나는 그가 말한 '영화' 같은 교향곡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버리고 말했다.
그날 포디움 위에 서 있던 연미복 차림의 한 사람은 지휘자가 아니었다. 영화감독이었다. 지휘가 아니라 디렉팅을 하더라. 나는 서울시향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누군가의 지시 아래 조종되는 장면을 처음 보았다.
보통은 지나치게 합이 잘 맞는다거나, 그들이 서로를 응시하는 타이밍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다고 느끼는 식이었다. 이렇게까지 지휘자의 손끝 아래에서 시시각각 새로운 음향을 탄생시키고, 서울시향에게서 내가 처음 보는 인상을 끌어내는 이는 내 생에 처음이었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의 일치감이 지나치게 높으면 그들의 소리가 덩어리가 되어 공중으로 둥- 하고 떠오르는데, 그건 단순한 한 덩어리가 아니라 정교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세상이다. 잡아삼켜진다는 감각. 소리가 자연이 될 수 있는가? 그 답을 여기서 주더라.
2악장에서는 오히려... 오히려... 새벽녘의 안개가 되어 있더라. 내가 예상한 것보다 그 시작의 합이 크게 들려서 좋았다. 음원으로 들었을 땐 고요했는데, 오히려 기대한 것보다 크게 와닿아서 따라가는 나는 무척이나 든든했다.
소리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는 느낌을 아실까? 그러니까 어디가 머리인지, 그 끝조차 보이지 않는 형체가 온갖 자연물의 힘을 얻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장르를 어느샌가부터 추측하기 시작했다. 블록버스터인가, 액션인가, 애니메이션일까?
아,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 사이를 휩쓸다가 지하 동굴로 빠져들어가는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가 분명한데, 감독의 뒷모습을 보면 그저 '자연'의 이야기일 수가 없다. 도대체 악보를 얼마나 파헤쳐 본 것일까? 관객에게 어디까지 시벨리우스를 각인시키려고 작정한 것일까?
현악이 일렁이는 선 하나를 그릴 때, 멀리 있는 곳은 작게 물결치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는 큰 곡선을 부여한다. 작은 디테일이 쌓이다 못해 몰아치니, 내가 지금 여기서 뭘 '당하고' 있는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교향곡이 왜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그럴까?' 하고, 화면이 매우 빠른 속도로 줌인되고 줌아웃된다.
이 교향곡 안에는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특정 선율이 있다. 나는 그 선율이 각 악장마다 어떻게 묘사될지, 그걸 내가 인지하면서 들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내려는 욕심은 다 버린 채 눈만 깜빡-깜빡이고 있었다.
크기가 달라졌다. 바이올린 한 대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들렸고, 오케스트라는 어느 순간 영화가 되었으며, 고작 내 손안에 있던 선은 양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내가 오케스트라를 통해 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선이다. 내게는 고작 실, 볼펜, 유성매직, 그 정도로만 생각했던 소리 선의 세상이 있었는데. 10일에는 양팔을 양옆으로 벌려야 했다.
고작 내 손안에서만 붙잡히던 선 대신, 왼손의 가장 끝에서 오른손의 가장 끝까지 벌려도 안아줄 수 없는 넓은 스케치 선이 그곳에 자리했다. 아... 내 세상이 넓어졌구나. 체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악장에서는 내가 진짜 어딘가로 끌려다 놓인 곳이 어디인지 눈치채고 말았다. 내가 있는 곳은 낡은 철판과 굴뚝, 파이프가 뒤엉킨 거대한 성이다. 커다란 쇠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성 전체가 기우뚱 흔들리고,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멀리서 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거대한 고철 생명체 같다.
지브리 영화를 보셨다면, 아시겠다. 그래, 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그 고철성 안에서 핀란드를 지나고 있었다. 영화 결말부에 나오는 두 주인공이 서 있던 그 테라스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이국의 땅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움직임을 부여했는가? 감독의 두 손 안에서. 누가 추진력을 부여했는가? 누구긴, 단원들이다!
4악장에서는 내가 상상했던 핀란드의 온도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려내고 있는 풍경 자체는 대체로 하얀 곳이 맞는데, 왜 이렇게 열감이 느껴질까? 원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뜨겁게 그림을 그려가는 저 화가의 손끝 언저리가 이곳까지 다가오니 소리가 이만큼 홧홧하다.
내가 그를 통해, 서울시향을 통해 이렇게까지 손쉽게 장르가 '시벨리우스'인 영화 한 편을 오케스트라로 경험해도 되는 건가? 너무 배부른 사치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최소한 3시간은 웨이팅하고 나서야 만날까 말까 한 수준인데...
왜 양일간 무대를 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이게 고작 단 하루만 나타날 일이라니...
며칠 전 나는 물었다. 교향곡이 왜 좋으냐고. 영화 같다는 대답을 듣고도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날은 알겠다. 양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는 선 위에서, 나는 핀란드를 지나고 있었다. 아, 이런. 나도 모르는 새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