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테마곡, 험버트 험버트의 '우리들의 마법'
잠 못 드는 새벽, 부산에 가는 표를 예매했다. 계획에 없던 여행이었다. 오전 6시를 조금 넘은 시각, 쏟아지는 비를 뚫고 집을 나섰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부산은 따뜻했다. 이것저것 꽉꽉 눌러 담은 빨간색 백팩과 크로스백 하나를 메고, 화장기 없는 몰골을 보며 친구와 시시덕거렸다.
"우리 완전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 속에서 생존하는 사람들 같아."
"짐이 너무 무거워서 뛰기 힘들 때, 뒤에서 좀비가 쫓아오는 상상을 하면 달리게 돼."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줄기차게 이어갔다. 남색 하늘 아래 하나둘씩 조명을 밝히는 도시가 아름다웠다. 여름과 빛은 잘 어울려서, 끈적거리고 숨이 차는 이 여름을 과감히 사랑해 보고 싶어졌다.

오래되어 보이는 동네 분식집에서 어묵 꼬치로 배를 채웠다. 그러곤 바다공원에 갔다. 가로등 빛을 받아, 땀이 번들거리는 러닝 크루들을 보았다. 헉헉거리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들은 빠르게 달리지 않아, 걷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박자를 맞추어 발을 굴렀다. 처음엔 강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자기들만의 흔들거림으로 무늬를 자아내는 바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뛰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후쿠오카로 떠나는 배를 보았다.
"배가 왜 이렇게 느려."
"짐이 많으니까. 저기서 하룻밤 자고 나면 후쿠오카야."
나는 부산에 왔는데, 누군가는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엔 애매해, 망고 빙수를 먹었다. 살짝 녹은 냉동 망고의 달콤 쌉싸름한 맛이 혀끝을 적셨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창문을 훑었다. 빙수 시럽처럼 붉고, 노랗게 녹아내리는 빛을 눈에 담았다. 프랜차이즈 빵집 빙수가 어째서인지 서울에서 먹는 것과 맛이 다른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게 여행은 매일 보고 듣던 것을 조금은 특별하다고 믿게 만드는 경험일 지도 모르겠다.

다음날은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 갔다. 문을 닫은 책방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전만큼 종이책을 잘 보지 않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면서도 씁쓸했다. 시들해진 관심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골목에서, 조금 울고 싶었다. 파란색 뜨개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 앞으로 봉고차가 멈춰 섰다. 트렁크를 열자, 노끈으로 친친 감긴 변색된 책이 한가득이었다. 방금까지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읽던 할머니가, 책 상태를 살피며 흥정하는 듯했다. 나는 그 장면이 헌책방에 가득 쌓인 소설책에 실려있을 것만 같아, 미소가 번졌다.

바로 건너편 카페에 들어가 벚꽃 에이드, 팬지 에이드를 시켰다. 평소라면 사 마시지 않았을 값비싼 카페 음료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색다른 메뉴를 먹어보자는 친구의 말에 카드를 긁었다. 음료를 기다리며 카페 안을 살폈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처럼 스마트폰을 하지도, 친구들과 대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치즈 케이크를 한 입, 두 입 먹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치즈 케이크를 어디까지 먹는지 지켜보았다. 그녀는 무더위에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머그잔과 포크를 번갈아 쥐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접시를 싹싹 비운 그녀가 카페를 나서, 길목 어딘가로 사라지는 뒷모습까지 눈에 담았다. 그녀에게서 내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전부 먹을 수 있는 노인이 되겠노라고 다짐했다.
보사노바 음악을 들으며 창 너머를 보았다. 미용실 앞 건조대에 널린 행주들, 화단에 핀 식물이 바람에 흔들렸다. 꼭 각자의 기울기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현수막과 전깃줄도 전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세상이 귀여워 보였다.

밤이 깊어지자, 마을 전체가 셔터를 내린 듯했다. 소화가 잘 안된다는 친구와 함께 정처 없이 산책했다. 친구가 장범준 노래 메들리를 불렀다.
"그렇게 노래방으로 가서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해, 무심한 척 준비 안 한 척 노래를 불렀네, 네게 들려주고파 전화를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아 아 아 아아아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아직은 답이 없는 이십 대의 늦여름 밤, 무거운 어깨 너머로, 엄마에게 전화를 거네, 엄마 용돈 좀 보내주세요."
"나 중1 때 장범준 진짜 좋아했는데."
"난 장범준 노래만 불러. 장범준 노래 중에서 엄마 용돈 좀 보내주세요, 라는 곡을 제일 좋아해."
우리의 접점이 또 하나 늘었다. 여행의 묘미는 함께한 이와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불편한 이부자리, 잠 못 드는 밤에 실없는 소리를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툭, 진심이 튀어나온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비밀을 건네준다는 것이다.
문득 올려다본 어둠의 끝, 붉은 글씨가 번쩍였다.
된다, 된다, 더 잘 된다!
나는 높은 빌딩의 전광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잘 될 거래."

여행 마지막 날, 송정 해변에 갔다. 버스를 타고 1시간 끝에 도착한 해변은 눈부시게 투명했다. 새하얗고 고운 모래사장을 본 게 얼마 만인지. 심장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였다. 원래 바다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자꾸만 빠지고 싶단 욕심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신발을 벗고, 청바지를 걷어붙인 채 물속에 들어갔다. 발이 땅속으로 푹푹, 빠져들고 파도가 거칠게 다리를 휘감았다. 중심을 잃고 자빠질 뻔했다. 흘러내린 바지 밑단이 전부 젖어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서부터 힘주어 달려온 파도가, 해변가에 닿는 순간 부드럽게 흩어졌다. 파도는 거품이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헤엄쳐 왔을까. 그리고 그 힘의 끝에서 하얀 포말이 된다는 걸, 파도는 알았을까. 젖은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걸 보며, 나 또한 거품이 되기 위해 헤엄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부수어질 걸 알면서도, 물거품이 될 줄을 알면서도 헤엄을 멈추지 않는 파도. 내가 즉흥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삶이 파도와 닮아서이지 않을까.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는 모든 역동성과 힘이 부드러운 포말로 사라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 같진 않다. 걱정, 고민, 불안과 같은 것들도 결국 나를 이루는 에너지 원이라면 마지막엔 전부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
거품이 될 때까지 온 세상을 누빈 파도처럼, 나도 순간의 기쁨과 재미를 만끽하며 넓은 세상을 살고 싶다. 거품이 되기 위해, 헤엄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