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말미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이다. 작품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이를 제작한 김재환 감독의 저서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원작으로 한다.
뮤지컬의 주인공은 문해 학교에서 한글 수업을 듣는 팔복리의 할머니들. 시대적 상황 때문에,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느라 한글을 깨치지 못했던 이들이다. 그런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시를 쓰는 모습은 ‘인생에 늦은 때는 없다.’라는 뭉클한 메시지를 선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감동이 ‘늦깎이 배움’에만 있다고 말하면 많은 것을 놓친다. 좋은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로 많은 결의 감동을 남기는 법. 이 작품 또한 그렇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방점은 ‘시’에 있다. 네 명의 할머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은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이 시를 쓰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할머니들은 문해 학교 소풍을 조건으로 내걸고 시를 쓰는데, 이들이 찾아낸 시의 테마는 각각 ‘영감, 꿈, 트라우마, 이름’이다. 찢긴 종이로 형상화된 무대 상단의 스크린에는 ‘춘심의 꿈’ 등의 자막이 띄워진다. 이는 각 에피소드를 분절하면서 인물들 각각의 인생사를 차례로 펼쳐 보이는, 책으로 친다면 일종의 '중간 표지'와 같이 기능한다.

“여기도 시. 저기도 시. 가마이 보니까 시가 참 만타.”라는 가사처럼 이 작품에서 시는 ‘창작하는 것’이 아닌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 인물들은 시상을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다. 인순은 시를 읽어 주던 첫사랑(인 동시에 후에는 ‘화상’이 된 영감)을 떠올리고, 춘심은 가수가 되고 싶었던 마음을 꺼내며 ‘팔복리 이미자’의 꿈을 펼치려 한다. 영란은 ‘닭’이란 단어를 쓰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분한은 딸이라 ‘분하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자신의 이름을 다시금 바라본다.
시를 통해 보여 주는 이들의 삶은 보편성을 담고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받지 못했던 세대의 아픔, 가족들을 챙기느라 꿈을 접어야 했던 경험 등은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다만, 이 작품은 각 캐릭터에 분명한 디테일을 부여해 캐릭터만의 특수성을 만들어 낸다. 손자의 동화책을 읽어 주지 못해 아들 집에 가는 것을 꺼렸던 영란, 남편이 화난 날에는 형벌처럼 은행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던 인순, 남편과 사별하고 기나긴 세월을 노래로 버텨온 춘심, 이름이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분한 등 캐릭터는 생생함을 입게 된다.
네 할머니는 이러한 인생을 시로 표현하고 의미화한다. 인물들이 살아온 삶의 굴곡은 구체적인 경험과 소재로 풀어내는 한편, 이들이 그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소화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인생의 “천지삐까리”에 “널려 있는”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 그것을 알고 있는 단어로 표현하는 일, 그러면서 오늘의 설렘을 찾아내는 일. 이때 시를 쓴다는 것은 전에 없던 특별한 언어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던 내 삶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그것이 이 작품이 네 할머니를 ‘주연’으로 세우는 까닭이다.
우리가 할머니들의 시에 감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언어화되지 못했던 한 사람의 삶이 문학이 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칠곡 할머니들의 일화와 공명하며 감동의 파장을 넓힌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칠곡 할머니들의 시를 모티브로 많은 넘버를 꾸렸다. 특히 '전국 시 낭송 대회' 장면에서 네 인물이 부르는 넘버는 실제 할머니들의 시(<처음 손잡던 날>, <도래꽃 마당>, <이뿌고 귀하다>, <어무이>)를 거의 그대로 노래하며, 진실한 목소리를 전한다.
시는 할머니들만 변화시키지 않는다. 문해 학교 선생님 가을과 다큐멘터리 감독 석구는 인순의 남편, 분한의 어머니 등을 멀티 캐릭터로 소화하며 할머니들의 인생사를 표현하는 한편, 할머니들을 통해 일상 속 '웃음’과 '행복'을 발견한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낯선 이들을 통해 전에 없던 감동을 주는 작품이 아니다. 관객들은 익숙한 인물들(그러나 무대 위에서는 자주 보지 못했던 인물들)을 보며 웃고 뭉클해하는 것을 넘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내 인생을 언어화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작품은 ‘끝’을 염두에 두며 여운을 남긴다. 한글을 배웠다고, 시를 발견했다고 일상 속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할머니들의 주변 사람들은 한 명씩 세상을 떠나고, 문해 학교 수업도 끝난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영정 사진을 찍자며 농담하거나, 한글을 알게 되어서 참 좋다며 웃는다. 작품은, 그리고 인물들은 언젠가는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갈 설렘을 찾아 시를 쓴다.” 그것이 할머니들의 시에 우리가 감동하는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다가오는 시간을 막을 수도 없다. 다만 내 인생을 표현해 줄 글자가 있다면, 믹스커피를 마시고 송창식 노래를 부르며 함께 웃을 친구가 있다면, 숨을 쉬고 살아갈 오늘이 있다면. 시는 아직도 천지삐까리에 널려 있다.

사진: 라이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