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이 멜로라는 장르적 틀에 갇힌 작품이어도, 그 안에 갇힌 의미들은 정교히 감성을 조립한다. <태풍클럽>의 불완전한 몸짓이 그 자체로 헤맴이라면, <청설>의 몸짓은 언어의 부재와 감각의 이탈을 기호로 사용한다. 감정을 발화로 직접 전달하지 못하는 영화는 지각의 전이를 통하여 청춘을 묘사한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듯, 우리는 몸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지각한다. 이러한 지각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자리 잡는 방식이다. <청설>의 몸짓은 단순한 비언어적 수단이 아닌, 관계를 맺기 위한 주체성을 가진다. 나아가 발화하지 못하는 인물조차 새로운 지각의 윤리를 체화한다.
프레임에 빛이 가득 차오를 때가 있다. 배경의 영향이라고 하기엔, 밤을 가리키는 시간에도 <청설>의 공간은 이상하리만치 밝다. 발화하지 못하는 인물의 언어를 보여주기에도 밝은 화면은 그 자체로 따듯하다. 예를 들어서, 발화를 빼앗긴 동생은 수영으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 동생을 지켜주는 인물이 나타났을 때, 화면 바깥을 지배해야 할 그늘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청설>의 조명은 단순한 채광을 넘어서, 인물 간 관계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시각화다. 장면의 빛이 조응할 때, 인물들이 맞이한 관계의 온도는 상승한다. 하지만 어둠이 비추는 순간, 영화는 급격히 현실의 문제를 껴안기 시작한다.
인물들의 허락한 대비는 배경의 전환으로 인해 찾아온다. 부정성을 동반한 어둠은 세 명의 인물과 맞닿는다. 용준은 짝사랑하는 여름, 그녀의 동생인 가을과 함께 지하의 클럽으로 향한다. 몸짓 언어로 소통하는 가을에게 클럽이라는 공간은 일생에서 한 번도 즐겨보지 못한 열망이다. 동생을 위하여 희생하는 여름 또한 마찬가지다. 그 안의 청춘은 방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웃음으로 가득 차 있는 채다. 하지만 청각의 부재는 이들에게 이미지로만 표현될 뿐, 타인과 같지 않다. 용준은 이들을 이끌고, 스피커 위에 손을 올린다. 음악이 전달되는 순간, 이들의 몸짓은 해방과 맞닿은 채다. 음각이 감싸야 하는 공간, 밝은 조명 속에서도 이들의 모습은 빛이 점령된 채다. 이후 밤거리로 나온 이들은 허락된 밤에 의하여 거리를 걷게 된다.
하지만 어둠이 가진 마력이 이들에게 뻗쳐온다. 이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용준은 부모님의 도시락집에서 일한다. 여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반복해도, 가을을 위해서 희생하는 삶. 가을 또한 여름이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의 불안함이 화면을 잠식하기 시작할 때, 현실의 문제가 서사 내부를 메운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의 그늘은 대비를 이룬다. 여름은 용준에게 선을 긋기 시작하고, 동생인 가을 또한 여름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꿈을 꾸는 이들에게 현실은 잔인할 뿐이다. 이러한 대비는 <청설>의 어둠이 허락받지 않은 채로 잠입할 때, 어둠은 곧 현실 자체를 의미한다.
결국 어둠이 빛을 완전히 삼켜버릴 것인가? 암흑이 덮친 이후, 인물들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용준은 어른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감정을 추스린다. 여름 또한 부모님에게 삶의 의미라는 물음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간다. 여름이 수영장에서 잠수하는 동안, 물 위를 응시하던 용준은 자신의 언어를 발화하기 시작한다. 감정의 고백은 결국 어둠을 몰아내고, 공간을 다시 빛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허락되지 않은 칠흑이 물러나는 순간, 이들의 주변에는 클로즈업과 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태풍클럽>이 강당의 몸짓을 롱 쇼트로 표현했듯, <해피 엔드>는 프리즈 프레임으로 유보된 관계를 강조했다. 반면 <청설>에서 롱 쇼트는 바깥의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될 뿐이다. 오히려 롱 쇼트 대신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의 감정, 관계의 밀도를 파고든다. 고정된 카메라가 아닌, 클로즈업의 적극적인 사용은 인물 간의 교류를 포착한다. 인물의 손짓, 움찔거림이 세밀하게 표현되는 구조는 오히려 발화보다 직접적이다. 용준과 여름의 첫 만남 속에서도, 클럽에서의 짧은 환희 속에서도, 시선은 그들 가까이 다가가며, 인물을 해체하는 시선을 유지한다.
이처럼 닫은 프레임은 넓은 배경, 공허함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청설> 내에서는 내면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인간을 표현한다. 여름은 불이 난 빌라에서 가을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용준이 여름과 가을 사이에 끼어들자, 여름과 용준의 사랑이 곧 불안정성을 가져온 계기가 된다. 가을이 입원한 병원에서 자매의 모습은 한 번도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본 적이 없다. 또한 희생적인 여름의 삶과 가을의 삶이 대치되는 순간, 자매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 한 번도 카메라가 멀리 떨어져 보지 않는다. 이는 희생을 옹호하거나, 혹은 발화의 부재로 인한 연출 방식보다는 인물을 더욱 가까이서 조망하려는 의도가 더 큰 듯하다. 현실의 어려움, 혹은 선천적인 문제를 가진 이들의 성장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주변부에 흔히 있고, 관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카메라는 거리감을 두지 않고, 인물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당신에게 가지고 있는 고난, 고난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보여주면서 당신의 고난 역시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위해서다.
<청설>은 청춘을 ‘극복하는 고난’으로 그림과 동시에, 감각으로도 새겨질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화면을 지배하는 빛은 연신 화면을 메꾸고, 어둠은 고난으로 표현될 뿐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또한 카메라는 거리감을 이끌지 않고, 몰입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허구성과 사실성 그 사이에서 헤매는 인물들은 이상적 방식의 결말을 추구한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다만 이는 어렸던 시간을 ‘일관된 방향’보다 ‘감정적 분절과 전이’로 조망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멈추면 뒤처지는 사회 속에서 관객들은 <청설>의 이미지에 몰입한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우리의 이상향은 아닐지언정,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교한 젊음이 이미지가 분명히 있었음을 증명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