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 노란색 바탕에 초록색 로고가 떠올랐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아주 멀리 있는 기억 속 장소에 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피오나는 캐나다에 있는 눈 오는 마을에 사는 여자이다. 그녀는 파리에 사는 이모 마르타에게서 온 편지 때문에 파리로 가서 사진을 찍던 중 강에 빠져 짐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 영화 포스터 속 피오나와 마주하고 있는 인물은 돔이라는 남자다. 돔은 쓰레기통에서 피망을 꺼내 먹기도 하는 노숙자같은 인물이다. 자신의 피망이 누군가의 낚싯줄에 걸려버리자 그걸 잡아당기던 중에 피오나의 짐을 줍게 되어 피오나의 옷도 입고 그녀의 돈으로 레스토랑에 가게 된다. 그곳의 누구도 자신과 춤춰주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고 있던 피오나에게 춤 신청을 하고는 함께 춤을 춘다. 피오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제대로 거절을 못해서 춤을 춘다.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도 모를 두 사람의 댄스는 굉장히 진지하기 때문에 재미있다.
극 중에서 돔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거침없고 책임감을 보이는 인물로 나타난다. 극의 중반에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을 알게 된 순간, 망설임 없이 피오나의 손을 잡고 걸어나가는 장면, 에펠탑에서 피오나가 잡고 있던 사다리가 넘어졌을 때 제대로 균형을 잡고 세우는 장면들은 순수하고 생각 없는 이 인물이 대책 없는 판단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돔에 비해 피오나는 극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영화 시작부터 곤경에 빠져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기도 하고, 주인공이 가질 수 있는 미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두 사람 중 누가 주인공이냐 물으면, 피오나라고 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피오나는 극 중 내내 걸어 다닌다. 영화는 그녀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피오나가 움직이지 않는 장면을 굳이 찾자면 극의 중후반부 세탁소 옷감 밑에서 잠든 장면 밖에 없다. 세탁소에 있던 커플이 하나하나씩 빨래를 개기 시작하면 빨래 맨 아래에 숨겨져 있던 피오나가 보인다. 이 커플 중 한명은 체격이 큰 여성이고 한 명은 앙상한 남성인데 둘은 매우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이들은 피오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서로에게만 관심이 팔려 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들 서로의 존재 이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음을 표현한 장면이다.
피오나와 돔 이외에 또 한명의 주요 인물은 마르타이다. 이 사람은 행방불명 상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있는 하얀 머리의 할머니이다. 이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딘가를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 자신의 장례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의 장례식인 곳에서 과거 연인 노르망을 만나기도 한다. 바깥 벤치에서 둘은 작아 보이는 두 쌍의 발로 경쾌하게 댄스를 춘다. 이 때 영화에선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두 인물의 모습은 젊어 보일 뿐 아니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화면에 이들의 얼굴이나 맨 살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따듯해 보이는 양말과 스타킹을 신은 다리와 바지, 검은색의 슈즈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 끝나자 또 다시 마르타는 어딘가로 떠나고, 어느새 나타난 도우미 앞에서 노르망은 힘 없는 노인의 역할로 되돌아간다.
마르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삶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매일의 하루에서 그 날에만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순간에 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으며, 계속해서 자신을 도우려 나타나는 사람들로부터 빠르게 멀어지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마르타는 파리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돔을 만나고 같이 샴페인을 마신다. 밤의 쓰레기통에서 빛을 내며 울리던 휴대폰을 마르타는 줍게 된다. 그건 피오나의 잃어버린 휴대폰이다. 그리고 피오나와 반갑게도 통화를 하면서 마르타는 아주 멋진 남자를 만났다고 말한다.
이 순간 돔은 잘 자고 있다. 마르타는 또 어딘가로 사라진다. 피오나는 마르타의 메시지를 단서로 돔이 있는 장소로 가고 눈 앞에 있는 돔을 부정하고 다른 멋진 남자를 찾다가 당신이 멋진 남자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때까지 돔은 자기 뺨을 때렸던 피오나에게 삐져 있어서 뾰루퉁하게 있다가 그 말을 듣자 굉장히 단호하게 말이 된다고 하면서 마르타를 찾아주겠다고 한다.
에펠탑에 올라간 피오나와 돔은 거기서 잠자고 있던 마르타를 만난다. 마르타는 자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장소가 아니면 편안히 잘 수 없는 듯하다. 피오나와 마르타는 많이 닮아있다. 둘 다 계속 걸어 다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멈춤 없이 어딘가로 떠돌아다닌다는 것, 자꾸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생각이 드는 지점이 이 영화에선 가장 중요하게 느껴진다.
피오나와 마르타, 돔은 에펠탑의 어느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드디어 가만히 앉아 있는다. 한 번은 올라와 보고 싶었다고 하면서. 그리고 마르타는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진다. 캐나다의 피오나 집으로 장면은 이동하고 거기서 마르타의 지인들이 반가운 기색으로 전화를 받다가 점점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보여준다. 그 다음 장면이 피오나가 꽃이 그려진 하얀색 자연분해 유골함을 안고 있고 그 옆에 자연스레 돔이 서 있는 모습이다.
돔은 마르타의 가짜 장례식에서는 추도사 시간에 자기 마음대로 이상한 소리를 해대었지만 진짜 마르타의 장례식에선 추도사 대신 1분간 묵념을 하자고 한다. 그때 갑자기 비가 왕창 와버리고 자연분해 유골함은 거의 녹아버린다. 그리고 돔이 강에 유골함을 집어던져버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바다 위엔 사진 한 장만 남는다. 젊은 마르타의 사진에 사람들은 목례를 한다.
피오나는 마지막 인사로 돔에게 손을 내밀지만, 돔은 다가가서 비주를 한다. 그 다음 순간,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피오나는 다시 화면상에 돌아와서 이야기한다. 프랑스어를 배워보고 싶었는데 당신만 괜찮다면 좀 더 있어볼까도 싶다고. 돔은 언제든지요, 라고 말한다. 이 때 이 두 사람의 조우는 이전처럼 우스꽝스럽지도, 희극적으로 진지한 것도 아닌 편안한 모습이었다. 이 장면에서 이들이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래도 어떻게든 같이 잘도 돌아다녔구나 하고 말이다.
이 글을 쓰며 영화를 다시 한 번 봤는데 다시 봐도 좋았다. 이 영화의 시간이 따듯한 오후의 거리처럼 한적하게 흘러가고 어떤 장면으로 되감기를 해도 질리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적 시간의 하나하나가 추억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들은 마치 사진집처럼 영화를 대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진과 영화가 얼마나 다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억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이 영화는 사진과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다. 어떤 부분에서 멈춰도 뭔가를 느끼게 되고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돔과 피오나, 그리고 마르타가 시간이 지나서 이 순간들을 다 잊게 되었을 때 다시 이 모습들을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