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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기꺼이 어긋나겠다는 용기로 - 배시은, 소공포 [도서]

'그 다음'을 원하는 것, 벗어나고자 하는 것. 거기서부터 우리의 미래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by 양예지 에디터
2024.10.21 20:34

 

 

0. 자각과 선언


 

우리는 곧바로

다음 상황에 놓인다

- 시인의 말


소공포는 구멍이 뚫려 있는 멸균된 면포로 지금은 나의 얼굴이다 나의 얼굴은 구멍이 뚫려 있는 멸균된 면포로 너의 얼굴에 내려앉는다 너와 나의 얼굴은 하나의 얼굴이다

- 「소공포」 中, 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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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포’는 수술 진료를 할 때 사용하는 구멍 뚫린 멸균된 면포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공포라는 제목을 처음 읽었을 때 小공포, 즉 작은 공포를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서 소공포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진다. 치과 진료를 받기 위해 얼굴에 소공포를 덮었을 때 우리는 입만 있는 사람이 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언제 입속으로 치료 기구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곧바로 그다음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미래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곧바로 다가오는 미래는 지겹도록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풍선을 찌르면 풍선이 터질 것이다. 줄자를 길게 잡아당겼다 놓으면 줄자통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배시은은 이제 현재 사람들이 다음 상황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가 더는 미래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충실할 현재가 온데간데없는 삶이란 곧 더 나아질 다음도 없는 삶을 이른다. 시인은 지금 세계가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의 한 순간에만 몰두하게 만듦으로써 지금 이후에 대한 상상을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 모든 대안이 가로막힌 자리는 지금 이곳을 얼마나 협소한 풍경으로 형성해버리는지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시인은 우리가 무감해져 있는 다음 상황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이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에 대항하려 하는 배시은의 태도는 용감하다. 시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다음 상황’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다.

 

 

 

1. 동일성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아. 그들 중 하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들은 나란히 몸을 누인다. 그러고 나자 오히려 편안하다. 


그들 중 하나의 생각밖에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중략)

나아진 게 없어.

여러분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똑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 중 하나는 마음속으로 너무 많이 생각하고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들 중 하나의 생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 중 하나는 왜 그들이 똑같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유일하다.

- 소공포 中, 73p

 

시집을 읽었을 때 나는 시인이 그렇게 배워버렸기 때문에 이미 굳어진 관념들에 진절머리를 느낀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자라면서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더는 그것을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위 시 「소공포」에서 시인은 지금을 방치하고 순응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시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좋은 것은 없’으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에 나란히 몸을 누이고 그렇게 나아감을 포기한다. 더는 다음을 꺼내지 않는다. 그러자 오히려 편안해진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동일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는 그들이 왜 모두 똑같이 생겼음을 알고 있다. 여기서 그들 중 하나는 시인이다. 이러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다음으로 나아가고자 하기에 그는 유일하다. 또 배시은의 글을 읽음으로써 자연히 다음 순간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독자들도 유일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다.

 

 

 

2. 재배치


 

시인은 언어의 질서와 반복에서 벗어나 재배치함으로 ‘다음 상황’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다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 「칫솔」 中. 14p


어떤 사실은 알려져 있고     어떤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의견을

가질 수 없다 의견을 갖는 순간 그 의견이

간과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후략)

- 「현재형 일기」 中, 29p


시인은 다양한 시에서 앞서 했던 언술을 미묘하게 변주하고 재배치하여 당연하게 생각했던 관념을 파괴하거나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독자는 시를 읽으며 내가 여태 믿고 있었던 것들이 진실이 맞는지 혼란을 느낀다. 동시에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독자는 다음에 어떤 말이, 어떤 형식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다음 상황을 기대하게 된다.


신을 생각하면 신이라는 글자를 생각한다

신이라는 글자는 어떤 느낌을 주기 전에 그 느낌을 앗아 간다


지구는 이미 아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다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아는 것을 다시 아는 것은 처음 아는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뒤돌아 뵙겠습니다


(중략)


그것은 그것 외 다른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네가 그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너를 열광시킨다

- 「종합영원」 中, 62p

 

대사를 외우면서 

생각을 줄였다


대사를 외우면서

대사를 외우면서 대사를


대사를 외운다는 생각이

대사를 따라잡을 때까지


대사를 줄였다

대사는 외우는 게 아니랬는데


상황을 이해하는 거라고 그는 외웠다

상황을 이해하기에 상황은 항상 멀리에 있다

- 「비더빙 디비디」 中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대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러나 배시은은 ‘안다는 것은 다시 알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상과 개념을 다시 주목하여 새롭게 이해해보려는 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시은이 다음 상황을 전복하기 위해 시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면서도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준다.

 

 


3. 뒤집기


 

무엇이든 액자에 가둬 봐

「이렇게」

「그럴듯하게」


(중략)


이 듬성듬성한 것이 이 슬픔이 내가 더 이상 읽어낼 수 없는 작품의 심오함이


나는 이미 느꼈다


나는 이 작품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해버렸다


도록은 집으로 가져가서 엽서를 만드는 데 쓴다

「무엇이든」 액자에 가두는 용기로

-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해버렸다」 中, 81p


바지를 펼쳐 놓는다


펼쳐둘 것이 필요하다 바지여서 펼쳐 둔 것이 아니고 

펼쳐둘 것이 필요해서 바지를 펼쳐 둔다 바지가 아닌 것이 없어서 바지를 펼쳐 둔다

펼쳐둘 것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중략)

펼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어도 펼칠 수가 있다 펼쳐 놓으면 나는 펼친 것과 같아지고 

나는 그것들과 눕는다

나는 그것들과 눕는다 나는 바지가 아닌 것들과 잠든다


나는 잠에 들 때 비로소 우연의 일치에서 벗어난다

- 「바지」 中, 121p


마침내 시인은 ‘다음 상황’, 일치로부터 벗어난다. 낫표로 무엇이든 가둬버리는 용기로, 바지를 입지 않고 펼쳐두는 식으로, 잠들어버림으로. 시집의 마지막 구절은 “나는 잠에 들 때 비로소 우연의 일치에서 벗어난다”이다. 처음 시집을 끝까지 읽었을 때 나는 조금 허무해졌다. 그렇게 다음을 전복시키려던 여태껏의 노력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굴레에 순응하지 않고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다. 허무에 빠져 미래를 포기하고 받아들이거나,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절망하기보다는 ‘무엇이든 액자에 가두는 용기로’ 유쾌하게 다음 반전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집에서 유쾌한 문체를 가진 시들이 비교적 뒤에 배치되어 있음은 시인 또한 이런 사실을 시를 쓰며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러한 배시은의 노력은 언덕 위에 바위를 굴리며 짓는 시지프의 웃음과도 비슷하다. 모두가 싸우려 하지 않는 ‘다음 상황’에 혼자 저항하기에 시인은 필연적으로 외롭다. 시집을 읽는 내내 어딘지 유리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그래서이다. 그러나 시집을 읽는 독자는 배시은의 이런 노력으로부터 내가 사실이자 당연하다고 믿고 방치했던 현재에서 벗어날 용기를 얻는다. 이 시집을 읽고 다음을 생각함으로써 ‘유일한’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 다음’을 원하는 것, 벗어나고자 하는 것. 거기서부터 우리의 미래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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