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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글과 나를 접착하기

by 정해영 에디터
2024.05.31 14:09

 


1.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다. 한 달에 서너 개 정도에 그마저도 몇 달을 쉴 때도 있지만, 써야 한다는 생각을 멈춘 적은 없으니 꾸준히 글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쓰는 이유를 단순하게 밝히면 이렇다. 글에서 나는 제법 용기 있는 모험가가 된다. 입으로는 뻥끗하지도 못할 말들과 생각을 짊어 메고 거침없이 길을 개척한다. 그려내는 지도의 크기에 한계는 없다.

 

오직 적어낸 글만으로 기억된다면 나는 실제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기록될 것이다. 글에는 내가 말하고 싶고, 걷고 싶고, 지키고 싶은 길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그 안에서 나는 여러 활동가이고, 자연 애호가이고, 생활 수영인이고, 불안을 가꾸는 심리학자이자 사랑과 평화의 수호자이다.

 

 

 

2.


 

글 밖을 나오는 순간 정녕 같은 글을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작은 내가 서 있다. 불안 속에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가 결국 어떤 언어도 꺼내지 못하는 빈 껍데기만 홀로 남아있다. 잠시 접신이라도 한 것처럼 글을 쓴 자아는 어느새 미지의 영역으로 휘발되어 있다.

 

 

 

3.


 

글을 쓰며 알게 됐다. 나의 관심사와 흥미는 쉽사리 공감받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불편하고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말하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깊이 감춰진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들추는 일이란 그 자체로 도발적이니까.

 

또 하나. 세상은 관성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인들은 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정과 핀잔과 조언과 격려를 쏟아냈다. 항상 생각했다. 단 일 초 만에 누군가의 말을 머금고 판단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그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찰나의 곱씹음을 보이지 않는다면 일단 멀리하고 의심하는 게 나의 관성이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을 고르는 데는 반드시 조금의 틈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세상의 시간이 나에겐 너무 급하다.

 

누군가의 말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세상에서 점차 입을 다물게 됐다. 막힌 입 대신 손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손으로 써 내리는 말은 분명 자유와 가까웠지만, 왜인지 공허함은 그대로 남았다. 글 안에서 해방되는 만큼 글 밖의 삶은 더 깊이 구속되는 느낌이었다. 글과 나 사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만 같았다. 그 차이가 혼란스럽고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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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근 일 년 동안 글을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과 타자의 말을 곱씹는다는 증거였다. 이들 역시 내면엔 호걸을 키우면서 겉으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겁쟁이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들에겐 무모하리만큼 마음을 열게 됐다.

 

기대는 묘하게 배반됐다. 대부분의 글쟁이들에게서 나와 다른 구석이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글과 접착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접착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 틈을 좁히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낯선 시도였다. 나에게 글은 이상향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치르는 단발적인 의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글은 나의 정수를 명확히 담고 있지만, 선언보단 허세 낀 외침에 가까웠다. 글과 완전히 포개어질 수 있다는 발상이 되려 급진적으로 느껴졌다. 그건 소수의 용기 있는 자만이 쟁취할 수 있는 보물이었다.

 

 

 

5.


 

급진적인 무리는 자기가 쓴 글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였다. 글과 그 생산자는 무척 유사하다고 믿는 듯 보였다. 그래서 글을 소중히 하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더 잘 쓰고 싶어 하고, 무엇보다 그 힘을 신뢰한다고 했다.

 

그들을 찬찬히 관찰하며 곱씹었다. 한 해가 지나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역시 나는 겁이 많다고. 그리고 그들도 크게 다르지 못하다고. 나는 겁이 많아 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그들은 겁이 많아 글을 향해 다가가는 것일 뿐이라고. 멀어짐과 가까워짐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엄청난 용기란 사실 두려움의 발로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내 두려움은 글과 같아질 수 없을 것이란 비망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글과 같아질 것이란 공포 때문이다. 사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사람이다.

 

터질 듯이 안아주는 누군가

망망한 숲과 울창한 바다

핀잔을 주지 않는 술친구

먼저 삶을 견디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이야기꾼

 

이 네 가지만 있다면 내 삶은 가득 찰 수 있다. 이 외에는 큰 끌림도, 강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 지금껏 써온 글은 이들 사이를 반복해서 떠돈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단조로운 사람이라니. 어느 자극 하나 먼저 나서서 찾는 법이 없고 그마저도 마음 깊이 들이지 못하는 삶이라니.


사실 글의 힘을 믿는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워했다. 그들이라면 내 안에 든 것이 별로 없다는걸, 누군가를 충족시켜 줄 에너지가 부족하단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으니까.

 

 

 

6.


 

불안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너무 분명하게 보였던 걸까. 그들은 변함없이 나를 향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들과 계속 눈을 맞댈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 아니 정말 감사하게도 그들은 알려준 셈이다. 누군가를 쉽게 동경하는 것은 쉽게 동정하는 것만큼이나 기만적이라는 걸.

 

그저 똑같이 흔들리는 존재로서 바라보고 포용할 때 비로소 동료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공정한 처사다. 단순한 상생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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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스로를 동정하고 모든 이를 동경하며 생긴 습관. 끊임없이 넓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모든 말을 교훈처럼 주워 담아 기록하고 어떻게든 소화하는 것. 시선의 지평을 무한 확장하는 것.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보이려고 애써 척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나는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팽창해 있다. 필요한 건 확장이 아닌 수축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것만을 여과해서 밀착하는 접착이다.

 

 

 

8.


 

글과 나를 접착하려 한다. 과거에 썼던 글을 살펴본다. 이것들을 입에 올려도 괜찮음을 인지한다. 그것이 내 전부여도 괜찮음을 믿는다. 이 모든 건 이야기의 힘을 믿는 이들과 함께할 때 가능했단 걸 기억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신뢰와 격려의 눈에서 단단한 마음이 솟아날 수 있단 걸 기억한다. 사랑을 피하지 않는다. 삶은 그게 전부일 수 있다는 걸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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