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프질을 할 때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하여 위에서 붓는 물을 가리켜 ‘마중물’이라고 한다. 오는 물을 맞이하는 한 바가지의 물이 마른 펌프를 촉촉하게 적셔주듯 우리의 건조한 일상 중에도 마중물 같은 사람들 또는 그런 순간들이 있으며,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한 바가지의 물이 되어주는 순간들도 있다. 서로에게 마중물일 수 있는 관계나 공동체에 속해있음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따금 곱씹곤 한다.
그래서 종종 우울감에 빠져드는 날이면, 친구와 대화하며 털어버리는 것조차 힘이 드는 날이면, 목마른 사슴이 개울가를 찾듯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의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모르지만 오로지 ‘청취자’로서 서로에게 마중물이 되어준다.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소리에만 의존하여 위로의 말과 공감의 말을 건넨다. 라디오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낯설지 않은 남이다.
그중에서도 심야 시간의 라디오를 자주 듣는다. 심야 라디오를 들을 때면 밤늦게 손님들을 태우거나 야식을 싣고 움직이며 라디오로 졸음을 쫓는 분들이 많다.
제주에서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는 청취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눈길 위를 긴장하며 운전하다 잠시 멈춰서 보내는 문자 한 통에서는 갓 삶아낸 감자의 냄새가 난다. 제주도로 여행을 오면 제주의 향토 음식인 몸국, 제주육개장, 고기 국수는 꼭 먹고 올라가라는 ‘제주 특파원’ 청취자의 말소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12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치킨집을 운영하는 청취자에게 취소하고 빨리 오라는 고객보다 ‘천천히, 조심히 오세요’라는 손님이 더 많기를 바란다며, ‘잘 될 겁니다’라고 말해주는 DJ의 다정한 말소리도 좋아한다. 라디오는 글과 음악과 사람과 이야기가 함께한다.
결과적으로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꿈이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한때 라디오 작가를 꿈꿨었다. 그리고 꿈의 찬란했던 시작부터 어영부영 시들해질 때까지를 함께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강다솜 아나운서가 진행한 MBC 표준 FM <잠 못 드는 이유 강다솜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들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종종 강다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틀어놓고는 한다.
‘막차 시간, 새벽의 골목길, 밤을 지새운 그 아이의 집 앞, 날짜 변경선, 그리고 음악이 흐르는 이곳, 자정과 새벽 2시 사이 잠 못 드는 이유 강다솜입니다.’ 가끔은 나도 강다솜 아나운서의 목소리 위로 오프닝멘트를 중얼거리고는 했다.
매일의 오프닝멘트와 클로징멘트엔 글자들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온도와, DJ 본인의 체온에 맞게 수정하여 읊어주는 그 온도가 함께 녹아있다. DJ의 다정한 목소리, 옅게 퍼지는 웃음소리, ‘전력질주!’하고 외치는 말 뒤의 느낌표를 여전히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