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음성해설'을 단순히 화면에 보이는 장면을 말로 설명하는 작업 정도로 생각했다. 인물이 걷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장면이 어디로 바뀌는지를 알려주는 일.
하지만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을 읽다 보면 음성해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된다. 무엇을 설명할지뿐만 아니라 언제 말할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원작의 분위기와 연출 의도를 어떻게 해치지 않을지까지 계속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서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우리나라 1호 음성해설 성우인 서수연 작가가 20년 넘게 일하며 쌓아온 경험을 담고 있다. 2003년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시작으로 영화와 드라마, 예능, 연극, 뮤지컬, 무용, 전시, 마술쇼까지 7,800여 작품의 음성해설을 맡았다고 한다. 음성해설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혼자 방법을 찾아가며 하나의 직업과 작업 방식을 만들어온 것이다.
“내가 눈을 감고 드라마를 감상하며 깨달은 바는 명료했다.
보이지 않는 상태로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것.
매 순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디어의 화려함 뒤에는 늘 소외된 감각이 웅크리고 있다.”(p.35)
작가는 자신이 쓴 음성해설만으로도 장면과 상황이 충분히 전달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눈을 감고 작품을 감상했다. 시각장애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의 해설을 다시 검증해본 셈이다.
그렇게 화면을 보지 않고 드라마를 따라가 보니, 평소에는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정보들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인물의 표정이나 시선, 배경에 놓인 물건, 말없이 지나가는 장면까지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화면에 의지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대사와 효과음만으로는 누가 어디에 있는지, 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는지조차 놓치기 쉽다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음성해설은 단순히 화면을 말로 옮기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작품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빈틈을 찾아 메우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성해설 대본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초창기에는 문장을 명사형으로 끝냈지만, 실제로 들어보니 대본의 지문처럼 딱딱하게 느껴져 ‘~다’로 끝나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현재 음성해설 대본의 틀이 잡히게 된다.
또한 음성해설 대본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된 문장은 원작의 대본에서 가져온 부분인데, 이는 단순히 장면을 새롭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원작자가 선택한 표현을 최대한 살려 작품의 분위기와 연출 의도를 지키기 위한 장치였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작업의 세계를 처음 들여다본 것 같아 신기하기도 했고, 하나의 작품을 누군가와 함께 감상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고민과 섬세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됐다.
“우리가 하는 일이 거창한 구원이나 예술은 아니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관객으로서 소외감 없이 다 같이 웃고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
딱 그 정도의 배려면 충분하지 않을까.”(p.96)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직업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시혜적인 시선이 아니라, 같은 작품을 함께 즐기는 관객으로 바라보려는 마음과 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이라는 표현조차 누군가를 구분 짓는 말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듣고 실제 대본에서 그 문구를 뺐다는 일화처럼 작은 표현 하나도 다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저자가 강조하는 '접근성'은 거창한 기술보다 먼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표지를 넘기면 책날개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등장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당신이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린 서로 다르지만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가볍게 지나쳤던 문장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다시 이 문장을 들여다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울컥했다.
20년 넘게 음성해설이라는 분야를 지키고 넓혀온 저자의 시간과, 단 한 사람도 작품 밖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서수연 작가의 마음이 그 짧은 문장 안에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음성해설을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작품을 함께 경험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믿어온 사람의 진심을 책을 통해 느끼며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제 알아요.'라고 화답하는 독자가 여기 있다고 작가에게 전하고 싶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음성해설 작가라는 낯선 직업을 소개하는 책이면서, 우리가 그동안 문화예술을 누구와 함께 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스크린이나 무대 뒤에서 존재하던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면서 책 속에 소개된 접근성 공연과 전시도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졌다.
누구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같은 장면에서 함께 웃고, 같은 작품을 각자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일. '음성해설'이라는 영역을 가장 다정하게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