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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얼굴도 곱고 심성도 고운 한 아이가 살았더랬다. 그 아이는 계모와 언니의 모진 구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착한 일을 하고 개구리도 구하고 불쌍한 할머니도 구하고… 그러다 훤칠한 도련님을 만나서 사랑했다지. 이를 질투한 언니가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언니랑 계모는 천벌을 받고 아이는 도련님과 행복하게 살았대.
이런 식의 전래동화를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위의 동화는 내가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든 서양이든 이런 동화가 넘치고 넘쳤고 나는 이런 류의 사랑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꼬마였다. 언젠가 내 인생에도 훤칠한 왕자가 백마를 타고 “이리 오너라~”하면서 나타나리라.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절망했다. 내가 절망한 정확한 이유 백마 탄 왕자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바로 거울 속의 내가 주인공들처럼 고운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왕자가 올 리 없어, 흑흑.
옛날 옛적의 이야기들은 은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무언가 말한다. 정상 가족, 이성애, 외형에 관한 구분 짓기 등. 가령 못생긴 아이는 심성도 나쁘게 묘사가 된다. 외모와 심성은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호감의 정도를 결정하고 배척의 원리를 형성하는 데에 자연스러운 근거로 쓰인다. 이렇게 동화에서 쓰이는 논리는 세계가 정상성을 구축하는 논리와 닮아있다. 누가 옳고 나쁜 것인지, 누가 정상이고 이건 비정상이라는 식의 논리 말이다. 중요한 건 이러한 정상성은 사회에서 남을 소외시키는 논리로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정상성에 맞추어 나의 모습을 판단하고 재단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전래동화를 통해서 교훈과 동시에 이런 정상성을 학습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정상성을 충실히 학습하고 충실히 좌절하며 성인이 된 나의 앞에, 한 동화가 나타났다. 희곡으로 유명한 배삼식 선생의 『지네 각시와 도라지 총각』이다. 이 동화는 어쩐지 다르다. 읽는 내내 먹먹하더니, 마지막에서는 눈물이 고인다. 그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이야기가 슬퍼서만은 아닐 것이다.
옛날 옛적에, 한쪽 눈이 파란 총각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눈이 징그럽다며 총각을 싫어했다. 총각은 눈을 감추기 위해서 한쪽 눈만 찡그리듯 감아도 봤지만, 오히려 더 징그럽다며 손가락질을 받을 뿐이었다. 추방당하듯, 산으로 도망친 총각은 여기서 나물이나 캐면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나물을 캐본 적이 없는 총각은 너무나 서툴렀고 그러다 지네에게 손가락을 물리고 만다. 악! 아픈 와중에 총각은 지네가 불쌍하다. 너나 나나 남들이 전부 징그럽다고 하는 존재구나. 그렇게 지네를 풀어준 총각의 등 뒤로 한 여인이 나타난다. 여인이 보이자, 눈을 감추기 위해서 총각은 한쪽 눈을 찡그리듯 감는다. 그러자 여인이 깔깔거리고는 무슨 수작이냐며 이미 봤으니, 눈을 뜨라고 한다. 여인은 총각을 향해 눈이 예쁘다고 말한다. 새파란 가을하늘처럼, 도라지꽃처럼.
여인은 자기가 산을 훤히 꿰고 있다면서 나물은 자기가 캘 테니, 총각에게 밥을 지으라고 한다. 자기가 밥을 지으면 어쩐지 쓰다면서 손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인의 손이 고추장에 담근 것처럼 빨갛다. 총각은 그러겠다고 한다. 여인은 한 가지를 더 부탁한다. 시장에 나가서 나물을 팔고 그곳에서 본 이야기를 자기에게 전해달라고. 총각은 이 역시 그러겠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공생관계로 함께 살면서 정이 담뿍 들게 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김새 때문에 소외된 존재들이다. 한 쪽 눈이 파랗거나 손이 빨간 것은 모두의 생김새와 같지 않은 ‘이상한’ 부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 사람을 공동체에서 추방했다. 그렇게 추방된 곳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함께하기로 한다. 이는 생김새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성급한 올바름도 아니고, 서로만이 서로를 거둬줄 수 있다는 구원 서사도 아니다. 두 사람은 본인이 추방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즉 정상성에서 벗어난 모습과 그로 인한 아픔을 그대로 품은 채 공생하는 것이다. 이 공생의 다른 재밌는 점은 둘의 역할이 반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전래동화에서 아내는 늘 집에서 가사를 담당하고 남편은 바깥일을 했다. 그러나 이 동화에서는 그 역할을 묘하게 중첩하고 반전시키면서 정상 가족에서 여성과 남성이 성별에 따라 역할이 나뉘는 관념을 피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은 시장에서 본 이상한 생김새의 스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는 각시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그러면서 그 스님을 다시 보면 뒤를 쫓아 어디로 가는지 알려달라고 한다. 다음 날 총각은 다시 스님을 보게 되고 뒤를 쫓는데 웬 산으로 가서 작은 구멍 속으로 쏙! 하고 사라진다. 총각이 구멍을 들여다보는데 구멍에서 스님이 튀어나온다. 스님은 나와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너랑 같이 사는 각시는 바로 지네라고. 그러면서 오늘 밤 까맣게 변장하고 뒷문으로 가서 몰래 확인해 보라며 그때 죽이지 않으면 너는 지네 밥이 될 거라고 경고한다. 근심이 가득해진 총각은 담뱃재를 까맣게 바르고 뒷문으로 돌아가 집을 몰래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꾸물꾸물 거대한 크기의 지네가 있다. 하지만 총각은 지네를 죽이지 못한다. 그렇게 가만히 굳어 있는 총각에게 지네 각시가 다가온다. 왜 자기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총각은 어떻게 그러느냐고 대답한다.
여자는 단순히 생김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정상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동화는 둘이 함께 살아가면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이 모든 걸 ‘정’이라고 말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은 사랑이라는 말과 완전히 대치할 수 없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기에 내칠 수 없는 진득함이, 누가 뭐라고 할 때 집으로 들여서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고 싶은 친밀함, 울고 있을 때 함께 울어주는 연대 같은 것이 혼재되어 있다. 그런 정은 서로가 어떤 존재인지, 그것이 정상에 부합하는지보다 우선 서로를 껴안게 만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대화한다.
이후 이야기는 지네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스님에게 원수를 갚기 위한 결투의 장으로 향해간다. 과연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 동화는 그야말로 ‘함께’에 관한 이야기다. 함께할 수 없다고 나가떨어진 두 사람이 함께하는 이야기이자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을 오가게 하는지 보여준다. 함께라는 건 사람을 웃게 만들고, 따뜻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든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