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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를 말하며 ‘수련’ 그림을 떠올리는 당신. 그렇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수련 이외에도 그가 시선을 두었던 세상의 면모를 문화해설자 박송이의 해설과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마음과 눈을 환히 밝히는 찬란한 빛이 아닌 그의 인생에서 짊어졌던 지독한 가난과 고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자 박송이는 2010년부터 파리에 거주해온 프랑스 공인 문화해설사다. 오르세와 오랑주리, 지베르니를 수없이 오가며 모네가 평생 좇았던 빛의 궤적을 기록해왔다고 한다. 그 이력 때문인지, 이 책은 미술사 교양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한 사람의 뒤를 따라다닌 사람의 기록처럼 읽힌다.


가난한 화가, 빛을 좇는 사람

책은 르아브르와 파리, 런던을 떠돌던 청년 모네에서 시작한다. 연인 카미유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도, 아버지는 축하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모네는 그제야 겨우 시간을 내 아이를 보러 갈 수 있었다.


그 시기에 그린 [생타드레스의 정원]에는 그날의 서운함이나 미안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가 바라던 평온한 중산층 가정의 풍경만이 고요하게 담겨 있다. 화가가 캔버스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우는지를 이 책은 그렇게 첫 장에서부터 보여준다.


조롱에서 이름을 얻다

아르장퇴유 시절 완성한 한 폭의 그림은 훗날 한 비평가로부터 벽지보다 못한 미완성작이라는 혹평을 듣는다. 그런데 그 조롱이, 역설적으로 이 새로운 화풍에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려던 말이 시대를 정의하는 이름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모네를 빛의 화가로만 가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가난과 거절, 집요한 고집까지 함께 보여줌으로써, 그가 끝내 붙잡은 빛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슬픔보다 빠른 눈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장면은 임종을 앞둔 아내 카미유를 그린 그림 이야기였다. 모네는 그 순간, 슬퍼하는 남편이기보다 안색의 빛깔 변화를 분석하는 화가로서의 본능을 먼저 자각한다. 그는 그런 자신에게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동료 화가 세잔은 모네를 두고, 그는 화가가 아니라 빛을 보는 눈 그 자체라고 평했다. 그 말이 칭찬인지 안타까움인지, 이 대목을 읽고서야 어렴풋이 알게 됐다.


하지만 책은 이 잔인함을 비난하지 않는다. 스스로 모델이 되기를 택했던 그녀에게, 그 변화의 순간을 영원히 캔버스에 남기는 것이야말로 모네가 바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애도였을 거라고, 저자는 조용히 짚는다.


건초더미와 협상하는 화가

힘든 시절에 그린 [여름]에는 오히려 가장 평온한 일상이 담겨 있다. 들판의 그늘 아래 앉은 카미유와 그 곁의 아들. 캔버스 밖에서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던 나날이었지만, 캔버스 안에는 굽히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만이 남았다.


그 고집은 [건초더미] 연작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같은 자리, 같은 건초더미를 계절마다 그리기 위해 모네는 이웃 농부들의 밭을 수시로 가로질렀고, 결국 탈곡을 늦춰달라며 돈을 지불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대목에서는 존경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들었다. 위대한 집념이라고 부를 수도, 자신의 예술을 위해 남의 생계를 미루게 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이 양면을 굳이 정리해주지 않는다.


수련, 무한이 된 방

지베르니에 정착한 뒤 모네는 평생의 마지막 화두를 만난다. 물의 정원과 수련. 오랑주리 미술관에 놓인 [수련 대장식화]는 두 개의 타원형 방을 연결하면 무한을 뜻하는 기호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날씨와 햇빛에 따라 그림의 색이 실시간으로 달라진다는 설명을 읽으며, 나는 이 공간에 직접 서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여덕 점의 그림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이어진다는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 연작은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잠기는 공간에 더 가깝다. 평생 빛을 좇던 화가가 마지막에 만든 것이, 빛 그 자체로 둘러싸인 방이었다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림 앞에 다시 서서

책은 그림 하나하나에 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 읽고 그림으로 돌아가면, 책이 굳이 말하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몇 점을 골라, 그 앞에 조금 더 서 있어 보려 한다.


[생타드레스의 정원] (1867)

책은 이 그림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위한 평온한 가정의 풍경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그림을 직접 들여다보면, 그 평온함이 어딘가 과하다. 테라스 위 인물들은 누구도 캔버스 쪽을, 그러니까 화가 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다들 바다를 향해, 혹은 서로를 향해 비스듬히 서 있다. 깃발은 또렷하게 펄럭이고,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다. 나는 이 그림이 평온한 가정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평온한 가정을 연기하는 그림이라고 읽었다. 모네는 그 연기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가장 화사한 색으로 그렸다.


[인상, 해돋이] (1872)

루이 르루아가 미완성작이라 비웃었던 그림. 막상 보면 그 비웃음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항구는 안개에 잠겨 있고, 해는 주황빛 얼룩에 가깝고, 배들은 몇 번의 붓질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바로 그 헐거움이 이 그림의 전부다. 모네는 항구를 그리지 않았다. 항구를 보는 그 순간의 눈을 그렸다. 우리가 실제로 무언가를 볼 때, 사실 이만큼만 본다. 나머지는 머릿속이 채운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조롱에서 나왔다는 사실보다, 이 그림이 인간의 눈이 작동하는 방식을 가장 정직하게 그렸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건초더미] 연작 (1890~91)

같은 들판, 같은 건초더미를 계절마다 다시 그린 그림들. 나란히 놓고 보면 건초더미는 거의 시계처럼 보인다. 노을의 주황, 눈의 푸른 그림자, 아침의 옅은 안개. 모네가 실제로 그리고 있던 건 건초더미가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걸, 연작을 한꺼번에 보고 나서야 알았다. 같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절이 한 바퀴 도는 걸 기다린다는 것. 그 인내심이 이 그림들의 진짜 주제다.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 (1879)

이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결이 다르다. 형태가 뭉개지고, 붓질이 거칠고 빠르다. 슬픔이 너무 커서 디테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건지, 색이 형태보다 먼저 손에 잡혔던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그림 앞에서는, 모네가 '보는 사람'이기를 멈추지 못했다는 책의 설명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솔직한 애도처럼 보였다. 슬픔을 그릴 수 없을 때, 색이라도 붙잡는 것.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수련-아침] (오랑주리 연작)

이 그림에는 수평선이 없다. 하늘과 물의 경계가 없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흐릿하다. 책은 이 공간을 무한으로 설계된 방이라고 설명하지만, 나는 이 흐릿함이 모네의 시력이 흐려지던 말년과 겹쳐 보였다. 경계를 잃어가던 눈으로, 그는 경계가 없는 그림을 그렸다. 실명이 그를 가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가 평생 좇던 것에 가장 가까운 그림을 그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검은색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모네의 장례식이다. 관습대로 그의 관 위에는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그런데 친구였던 클레망소가 그 천을 거칠게 걷어내고, 창문에 걸려 있던 화사한 꽃무늬 커튼을 대신 씌웠다. 평생 빛만을 그렸던 친구를, 차가운 어둠으로 보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272쪽에 100점의 도판을 한 번에 읽어내기엔 다소 숨이 차는 책이다. 한 번에 끝까지 읽기보다는,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펼쳐보는 책에 더 가깝다.


86세까지 2,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는 그의 생애를, 이 책은 단 100점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가난과 사별, 시력을 잃어가는 공포 속에서도 그는 빛이라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모네, 빛의 순간들〉은 그런 책이다. 화려한 그림 너머의 가난과 집념을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면, 가장 평범한 오늘의 빛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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