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품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늘 조금 난감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선뜻 떠오르는 작품은 없었다. 어떤 작품이 좋냐고 물으면 그때그때 생각나는 그림을 말했을 뿐, 정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작품만큼은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남아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Le Lit》.
처음 이 그림을 만난 건 미술관이 아니었다. 2021년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넘기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계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미술 관련 계정이었을 것이다. 스크롤을 내리다가 손이 멈췄다. 붉은 이불 아래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뿐이었다. 누군가는 이 그림을 보고 사랑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로트렉과 벨 에포크 시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제목도 몰랐고, 작가도 몰랐다. 그저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림 속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특별한 표정을 짓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방에 이 그림을 걸어두면 나도 저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작품 제목도, 작가의 이름도 몰랐다. 그저 이유 없이 좋아하게 된 그림 한 점이 생겼을 뿐이다.
어쩌면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반드시 미술관에서 만나야 하는 것도, 어려운 해설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1년 뒤, 가족과 함께 파리를 찾았다. 오르셰 미술관에 갔던 날을 꽤 또렷하게 기억한다. 사실 그때의 나는 오르셰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다. 첫 유럽 여행이었고, 여행사 일정에 포함된 코스였기에 그저 따라간 것에 가까웠다. 심지어 루브르 박물관도 가지 못하는데 이름도 낯선 오르셰 미술관에 간다며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미술관에 도착해서도 마음이 급했다. 관람 시간은 두 시간 남짓뿐이었다. 넓은 전시장을 제대로 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전시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층을 오르내리고, 지도를 접었다 펼쳤다 하며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작품을 감상했다기보다 수집하듯 보고 다녔던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 어느 전시장 한쪽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Le Lit》이었다.
화면 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림이 눈앞에 있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멀리서 사진으로만 보던 존재가 갑자기 현실이 되는 순간. 생각보다 작았고, 생각보다 조용했지만 이상하게 압도적이었다. 몇 년 동안 휴대폰 화면으로만 보던 그림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아하는 가수를 처음 실제로 마주했을 때도 이런 기분일까. 익숙한 얼굴인데 낯설고,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한동안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이 그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날 이후 나는 로트렉이라는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우아한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유전 질환으로 인해 신체 성장이 멈췄고, 그는 평생 자신의 몸과 사회적 시선 사이에서 소외를 경험했다. 결국 그가 머문 곳은 파리의 사창가였다.
흥미로운 것은 로트렉이 그곳의 여성들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사창가를 자극적인 대상으로 소비했던 것과 달리, 로트렉은 그들의 일상과 휴식을 그렸다. 화장을 고치고,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자고, 서로를 기대는 순간들 말이다.
《Le Lit》 역시 그런 작품이다. 붉은 이불 아래 나란히 누운 두 여성은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다.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서사도 없다. 오히려 그림은 두 사람만의 조용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한 감각을 준다.
어쩌면 내가 처음 이 그림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그림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온기와 침묵을 보여준다.
사실 로트렉의 삶을 알게 된 뒤에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내가 위로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사실은 고독과 소외를 경험한 사람이 남긴 이미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알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림이 좋았다. 아니, 어쩌면 더 좋아졌다. 평온한 그림이 반드시 평온한 삶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타인의 온기를 발견할 수 있고, 결핍 속에서도 누군가의 휴식과 애정을 그려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힘든 날이면 종종 이 그림을 바라본다.
지금도 《Le Lit》은 내 침대 맞은편 벽에 걸려 있다. 오르셰 미술관에서 구입한 포스터에 이어, 최근 유럽 여행에서는 아트 프린트로 한 장 더 사 왔다. 누우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를 정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완벽하게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꼭 설명할 수 있어야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미술관도 아닌 인스타그램에서 이 그림을 처음 만났다. 작품의 제목도, 작가의 이름도, 미술사적 의미도 모른 채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서 나는 예술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만나고, 누군가는 책에서 만나고, 누군가는 스크롤을 내리다 우연히 마주친 이미지 한 장에서 만난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만났느냐가 아니라, 그 작품이 얼마나 오래 곁에 남는가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Le Lit》은 그런 그림이다.
몇 년이 지나도 잠들기 전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그림. 그리고 예술이 반드시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도 조용히 알려주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