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강이 다가오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익숙한 현실에서 도망쳐서 낯선 도시의 낭만으로. 시간이든, 돈이든, 체력이든,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이 낭만의 발목을 잡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프랑스 파리다.
이유를 묻는다면, 도시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파리에 간다면 어떤 미술관부터 방문하고 싶은지, 어떤 동선으로 이동하고 싶은지는 구체적으로 계획해본 적 없었다. 그저 막연히 '파리에서는 미술관을 가야지'라는 생각만 남겨둘 뿐이었다. 괜한 기대감에 이것저것 찾아보았다가 대책없이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강해질까봐 망설여지기도 했고.
하지만 일단 그런 마음이 있는 이상, <파리의 작은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막연하게 꿈꿔왔던 파리의 미술관들. 그 골목골목에 대한 설명이 조금은 목가적이고 조금은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저자 특유의 문체가 마치 담담한 산책길 같다.
![[파리의 작은 미술관] 입체표지.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08171735_dkphitkp.jpg)
도서는 크게 여덟 챕터로 나뉘어 '파리의 작은 미술관'들을 소개한다. 미술관의 주역들은 단순히 캔버스 속 회화가 아니다. 때로는 조각이, 건축이, 무엇보다 예술가 그 자신이 미술관의 주인공이 된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이나 몽마르트르 미술관처럼 여러 예술가의 작품들이 한 곳에 모인 경우도 있지만 로댕이나 귀스타브 모로처럼 개인을 조망한 미술관도 많다. 그들의 삶은 때로 작품 속에서, 심지어 전시 배치와 건물 구조 속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방문하고 싶은 미술관이 쌓이고 쌓인다. 이곳들을 모두 찾아가고, 또 루브르랑 오르세도 구경하려면 파리에서 며칠쯤 머물러야 하는 걸까······. 그렇잖아도 종강이 가까워져 오는 탓에 근거없이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붙들고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보고 싶은 곳들은 꼭 생겨나기 마련이다. 상세한 저자의 서술이 그러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도서에 소개된 여덟 곳의 미술관들 중 특히 마음에 와닿던 것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이었다.
먼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의 서사는 상당히 복합적이다. 인상주의를 혐오하며 신고전주의 작품들을 추구했던 폴 마르모탕이 설립한 미술관에, 시간이 흘러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함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이러한 기묘한 공존은 독자인 나의 갈등과도 일정 부분 맞아떨어진다.
현대 한국에서 인상주의는 많은 주목을 받는 유파이다. 나 역시 모네의 건초더미와 수련 연작 특유의 색감이나 분위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리하여 '인상주의'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 단정하고 확실한 윤곽을 가진 신고전주의 작품에서 훨씬 더 편안함과 흥미로움을 찾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이 꼭 내 마음과도 닮았다고 느껴졌다. 한때는 대립했고 지금은 공존하는 화파들의 양립을 목격하러 가보고 싶어졌다.
한편 로댕 미술관은 조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술 작품은 대부분 회화인 데다가, 학교 미술 시간에도 조각에 대해서는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관심이 덜한 편이었다. 지금은 완결된 기맹기 작가의 웹툰 <자매전쟁>을 통해 조각의 매력을 느끼기도 했지만, 대부분 실존하는 인물이나 작품이 아니다보니 흥미가 본격화 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책 속 로댕 미술관에 대한 서술을 따라가면서 직접 작품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회화에 비해 조각은 각도에 따라 시선에 들어오는 상이 달라지고, 입체적인 조형이 현장감을 극대화하는 예술이니까. 물론 회화도 그렇지만 조각 작품은 더더욱 직접 봐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들의 활동과 미술관의 건립 과정을 따라가면서 실감한 것은 프랑스 파리가 상당히 모순적인 도시라는 점이었다. 유럽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공간이었지만, 정작 아카데미와 정부는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기엔 꽤나 보수적이었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예술가의 기증 의사나 미술관 설립도 망설이는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럼에도' 파리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어간 동력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파리였을까.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잘 모르겠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지구 반대편의 인간에게는 솔직히 좀 어려운 질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파리를 방문해야지.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또 같은 결론이 난다.
파리와, 파리의 예술가들과, 예술가들의 흔적을 담은 미술관. 그 미술관을 찾아 걷는 저자의 서술은 어렵지 않다. 묵묵히 걷듯이 담담하고, 사진 속 햇살 좋은 골목의 모습처럼 설레인다. 미술관은 과거를 살아갔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현대에 재현되는 방식을 말해주고 있다.
그 이야기를 따라 책장을 펼치면 우리는 언젠가의 파리로 갈 수 있다. 과거 예술가들이 걸었던 파리의 골목길이나, 미래의 내가 여행하며 따라 걸을 그곳의 감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