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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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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는 내 생일 날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개학 일주일 전이라 마음이 복잡한 시기였고, 또 겨울방학 동안 친구들을 자주 보지 못해 축하받기에도 편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뒤로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올해 한 친구에게 이런 말로 시작하는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벌써 너 생일이라니 봄이 다가오고 있나 봐!"


문득 앞으로는 내가 태어난 날짜가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김수영, <봄밤>

 

 

2월 마지막 주가 되자 신기하게도 날이 풀린 것이 느껴진다. 이 봄의 공기가 무척 좋다. 그 중심에는 김수영의 시 <봄밤>과 권여선의 단편소설 <봄밤>이 있다. 우선 권여선 <봄밤>에 대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전까지 내게 구원으로서의 사랑이란 상하관계라는 느낌이 강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왁자지껄한 해수욕장에서 홀로 가라앉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물속에서 헤엄도 쳐보고 발버둥도 쳐보지만 결국 바닥에 닿는다. 무력해진 그는 이제 수면 위에서 나를 향해 내려와 줄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경과 수환, 어쩌면 볼품없는 두 사람의 사랑은 지극히 수평적이다. 다만 그 수평이 이루어진 곳이 바닥이다.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나란히 주저앉은 채로 만났다. 둘은 더 이상 아등바등 올라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손을 맞잡고 둥둥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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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나이도 쉰다섯으로 동갑인 부부다. 영경은 이혼을 했고 아이는 시댁에 빼앗겼으며 교직도 내려놓을 만큼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다. 수환은 스무 살부터 쇳일을 해온 탓에 심각한 류머티즘 관절염과 합병증을 앓는다. 사업 부도로 신용 불량자가 됐고 아내도 떠났다. 둘은 그런 상태에서 만났다.


이 작품이 수록된 소설집인 <안녕 주정뱅이>에 실려있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의 ‘없음’을 알아본 둘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비록 둘 다 요양원에 있고 가족들에게도 짐인 처지지만, 서로에게만큼은 귀한 사랑이다.


그러다 어느 날 영경은 요양원에서 수환과 인사를 나누고 또 술을 마시러 외출한다. 그녀는 술에 취해 김수영의 <봄밤>을 점점 큰소리로 외친다. 목련 나무 아래에서 펑펑 울면서도 감정 조절 장애 탓이겠거니 생각한다. 모텔방에 들어가면 수환에게 전화해야지, 내일 돌아가야지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시를 또박또박 읊는다.


그즈음 수환은 둘이 처음 만났던 봄밤과 지금의 봄밤을 떠올리며 죽어갔다. 영경은 전화를 하지도, 다음날 돌아가지도 못했다. 알코올성 치매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 소설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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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봄밤은 어떤 시간일까. 1년 중 가장 날씨가 좋고 선선한, 꽃가지 사이로 보이는 까만 밤하늘이 좋은 시간이다. 따사로운 햇살은 없어 아쉽지만,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밤들이다.


이 시의 화자는 어느 봄날 밤이 다 되어서야 깨어나 숙취에 시달리고 있나 보다. 밖을 보면 강물에는 달빛이 아름답게 떨어져 있고, 개가 울어대고 종이 울려대는 통에 심장은 점차 깨어나며 불안함으로 콩닥일 것이다. 그래도 서둘지 말자고 되뇐다. 봄이기 때문이다.


2연을 보면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라는 표현이 나온다. 지구의 주변을 계속 돌기만 하는 것처럼 목표에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모습. 혹은 한 달마다 차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하늘을 도는 것처럼 늘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리라는 뜻. 무엇이 되었든 둘 다 힘들어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화자는 계속해서 서둘지 말 것을 강조한다. 피곤하고 슬플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 그러니 나의 봄은 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꽃이 필 것이다. ‘나’는 ‘귀여운 아들’인 ‘절제’를 낳고, 마지막까지 ‘영감’을 잊지 않을 뿐이다.

 

*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영경은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외쳤을까. 수환은 어떤 마음으로 봄밤을 떠올렸을까. 남들보다 한참 뒤처진 삶이었대도 누군가에겐 값진 마음이 아니었을까. 영경과 수환은 그걸 꿈꾸었을 것만 같다. 나 역시도 그런 꿈을 꾸고 싶다. 이렇게까지 문학을 사랑할 계획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3월의 어느 봄밤엔 목련나무 아래에서 저 시와 소설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 밑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인다면 나일지도 모르겠다. “안녕 주정뱅이”하고 인사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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