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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다. 영화나 드라마가 쏟아지고, 바쁜 현대인을 위해 요약본이나 오디오북까지 대중화됐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이야기를 ‘소비’하기엔 참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모든 게 풍족한 지금과 달리, 조선 시대에 이야기를 즐긴다는 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다. 책값은 비싸고 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던 때, 사람들에게 이야기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던 존재가 있었다. 바로 지금의 오디오북이자 움직이는 영화관이었던 ‘전기수’다.

 

뮤지컬 <판>은 바로 그 전기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양반가 자제인 달수가 희대의 이야기꾼 호태를 만나 진짜 이야기꾼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며, 조선이라는 배경 뒤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과 현실의 모순을 짚어낸다.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 ‘판’의 서막


 

극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묘한 공기다. 일반적인 극의 형태와 달리, 시작 전부터 관객을 극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조선 시대 말투로 들려오는 안내 방송과 어셔들의 모습은 이곳이 단순한 극장이 아닌, 누군가의 이야기가 시작될 ‘판’임을 암시한다.


이 과정에서 무대 옆을 지키는 ‘산받이’의 역할은 꽤나 각별하다. 배우와 관객 사이에서 호흡을 조율하는 산받이는 시작에 앞서 추임새를 제안한다. 처음에는 낯설게만 느껴졌던 추임새가 극이 진행될수록 자연스러운 호흡이 되어 무대를 채운다. 이런 장치는 전기수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청중과 기운을 맞추던 방식을 무대 위로 가져온 시도처럼 느껴졌다. 어색함이 사라지고 하나의 공명이 만들어질 때, 관객은 비로소 이야기 속으로 녹아든다.

 

 

 

함께 빚어내는 순간의 기록


 

뮤지컬 <판>의 구성에서 인상적인 것은 배우들의 시선이다. 자신의 장면이 끝나도 무대 뒤로 완전히 퇴장하지 않고 무대 옆에 머물며 관객과 같은 시선에서 극을 바라본다. 때로는 추임새를 넣고 때로는 동료의 연기에 반응하며, 전기수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이야기의 밀도를 조율하던 현장성을 녹여낸다.


특히 관객의 참여로 이야기가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장면은 이 공연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날 만들어진 이야기가 서사적으로 완벽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상적이었던 건 완성도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함께 완성하기 위해 애쓰는 태도와 그에 반응하는 관객들의 웃음이었다. 단순히 극을 지켜보는 존재가 아닌, 그 순간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극은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던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목격하고 변화하는 과정은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관객은 지금 어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또 어떤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억눌린 현실을 비틀어 드러내는 이야기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하다는 사실을 작품은 담담하게 증명해낸다.


이야기는 즐거움을 주는 오락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진실을 비틀어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전기수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묘하게 지금의 세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야기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공기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야기가 머무는 자리에 남는 것들


 

무대는 거창한 장치 대신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에 집중한다. 소박한 구조 위에서 소품을 활용해 수많은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상상력을 극대화하던 전기수의 방식을 닮아있다. 결국 뮤지컬 <판>은 우리에게 이야기가 왜 여전히 필요한지를 묻는다.


전기수는 서민들에게 웃음을 주고, 불합리한 현실에 무뎌지지 않도록 말을 건네는 존재였다. 기억은 기록하지 않으면 휘발되지만,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나눈 이야기는 삶을 바꾸는 힘이 된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어떤 것을 기억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질 테다. 극장을 나서며 입가에 맴도는 추임새를 떠올려본다. 그 찰나의 기억이야말로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따뜻한 기록이자,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의 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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